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배우 이영애의 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신사임당의 기세가 대단하다. 5백년 전 조선 시대 전생과 현생을 오고가는 환상적인 소재라서 더 흥미를 끄는 모양이다. 드라마는 사임당의 부덕(婦德)보다는 예술혼에 무게를 두는 것 같아 앞으로의 전개가 주목되고 있다.

신사임당은 조선 유교사회가 배출한 부덕(婦德)의 표상이었으며 가장 훌륭한 자녀들을 키운 어머니 상이다. 사임당이 5백여년 가장 존경을 받았던 율곡 이이(李珥)를 낳지 않았다면 서화를 잘 그렸던 여류 예술가에 지나지 않았을 게다.

그녀는 슬하에 일곱 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으나 남편과는 돈독치 못했다. 문학소녀 허난설헌이 방탕한 남편 김성립과의 갈등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듯이 사임당도 남편과 평생 소원하게 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덕을 생명으로 삼았던 사임당이 왜 남편과는 두터운 정을 누리지 못했을까.

명문 덕수이씨 집안의 자제였던 이원수는 학문보다는 풍류를 좋아했다. 사임당은 이런 남편에게 잡기를 끊고 과거를 위한 결단을 주문했다. 남편의 짐을 싸 주며 산에 가서 10년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의지가 부족했던 남편은 산으로 간 지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임당은 남편 앞에 서릿발 같은 냉정함을 보였다.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려 하면서 “만약 당신이 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비구니가 되어 산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남편은 다시 가기 싫은 산으로 돌아갔으나 얼마 안 돼 하산하고 말았다.

냉정한 사임당을 남편 이원수는 외면하기 시작했다. 사임당의 남편에 대한 실의와 번뇌는 더욱 커졌다. 줄줄이 많은 자녀를 둔 남편이지만 저자거리에서 술을 팔았던 기생출신을 첩으로 들여앉힌 것이다. 질투가 칠거지악의 하나여서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던 사임당으로서는 가슴을 칠 일이었다. 그런데 첩은 술을 마시면 주정을 부렸다.

조선 후기 정내주(鄭來周)가 지은 동계만록(桐溪漫錄)에 사임당이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당부한 얘기가 기록된다. “내가 죽은 뒤에 다시 장가들지 마세요. 우리에게 이미 아들 넷, 딸 셋, 7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또 다시 자식을 둔다면 예기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자녀교육을 해야 했던 사임당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녀는 남편이 사는 파주보다는 친정 강릉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지만 자녀들이 공부를 외면하고 축첩한 행태를 배울까 걱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율곡은 아름다운 고장 강릉에서 사임당의 반듯한 가르침으로 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남편이 이루지 못한 유학자로서의 성공을 아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율곡은 13세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사임당을 기쁘게 했다.

그런데 사임당은 율곡이 18세가 되던 해 갑자기 운명을 했다. 사임당의 나이 48세였다. 율곡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할 생각이었다. 1년간 금강산에서 지낸 율곡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하산하여 벼슬길을 선택한다.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교육서를 많이 만들어 낸 것도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율곡을 존경했던 숙종은 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는 특별히 어제 시를 짓는다. “풀이여 벌레여 그 모양 너무 닮아, 부인이 그려 낸 것 어찌 그리 교묘할꼬, …(중략)… 채색만을 쓴 것이라 한결 더 아름다워라”고 감탄했다.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우암 송시열도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오히려 능히 혼연히 자연을 이뤄 사람의 힘을 빌려 된 것은 아닌 것 같네.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고 평가했다.

사임당 정신은 이 시대에도 훌륭하게 자녀들을 키우는 자양분이다. 그녀는 넉넉지 못했던 살림을 돕고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밤늦게까지 자수를 놓았으며 바느질을 했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새벽부터 힘든 알바도 마다 않는 한국의 열혈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전 미국대통령 오바마도 감탄한 한국 어머니들의 자녀들에 대한 열정 DNA가 사임당에서 비롯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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