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매년 추위가 닥치는 초겨울 길목에서는 누구에게라도 걱정거리가 한두 개 따르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월동 준비에 매달려야 할 서민의 시름이 가장 크지만 국민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와 정치계에서도 걱정거리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중 하나가 다음해 나라살림을 결정하는 예산이다. 과연 법정시한 내 처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인데, 다행히 지난 2013년도에 마련된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여야가 합의되지 않아도 12월 2일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에 자동부의하게 됐으니 이 문제만큼은 한시름 놓게 됐다.

요즘 들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렇다보니 토픽뉴스나 세간에서 ‘사상 초유’니 ‘사상최대’ 또는 ‘슈퍼’니 하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바, 좋은 소식이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편할 테지만 올 연말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사건들이 그렇지 않아 국민이 분노해 하는 어두운 사회분위기다. 사상 초유로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이 된 것도 나라의 장래를 불안하게 하거니와 바야흐로 연 400조원이 넘는 슈퍼예산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 힘겨울 것 같아 우울한 초겨울이다.

창문 유리창을 통해 따뜻하게 전해져오는 겨울햇살 속에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라디오를 켜본다. 전파를 타고 겨울추위 이야기와 주변에서 어렵지만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해나가는 사람들의 사연도 소개되고 있다.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시대가 지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경제현실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주안점을 이룬다는 소식이다. 우리 사회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현재 우리가 맞는 시국은 마치 딴 나라 사연같이 생각된다.

다소 여유 있는 아침시간에 잠시 라디오를 들었지만 흘러나오는 사연들은 대개가 서민들의 진솔한 삶의 편린이 담긴 이야기들이어서 좋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큰 것들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웃들이 공평하게 대접받으면서 조금 더 편히, 조금 더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소박한 욕망들이다. 그래서 신문지상이나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사회소식보다 전파를 타고 흐르는 서민들의 목소리를 내가 가끔씩 듣기 좋아하는 것은 그 속에는 소망이 우러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서 한 10분 정도 청취한 사연들의 뒤끝에서 생각나는 것은 살림살이에 관한 언급이다.

‘서민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갈 때에는 먼저 수입을 생각하고 지출을 생각하게 되지만, 나라살림에서는 쓸 돈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 수입을 정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라디오 진행자가 출연자들이 저마다 걱정하는 개인적 살림살이를 이야기하면서 정부예산과 비교해 말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해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부예산은 당장 돈이 없어도 국가채무 등 빚을 내서 한 해 나라살림 씀씀이를 짜더라도 현 정부나 국회가 책임질 일이 아닌 특성으로 인해서다.

2일 개최된 국회 본회의에서는 사상 처음 ‘400조 5459억원’ 규모의 내년도 정부예산안이 통과됐다. 400조 ‘슈퍼예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국이 어지러운 판에 국회의 중요 임무 중 하나인 예산심의·의결이 마무리됐다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는 ‘탄핵태풍 속 국회, 또 다시 예산안 처리시한 못 지켰다’는 보도가 나왔는바, 이번 예산국회에서 정부예산안이 통과된 시간은 12월 3일 오전 3시 57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법정시한보다 4시간 가까이 지연된 것인데, 엄격한 잣대로 따지자면 언론비판은 맞지만 전후 사정이 있었다.

즉 예전처럼 여야가 협의가 되지 않고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시한이 늦춰진 것이 아니라 2일 오전, 정부와 여야가 소득세 최고 구간 등 현안 사안에 대해 합의를 한 뒤 예산안수정안을 변경하는 행정과정적 시간소요로 인해 지연됐다. 즉, 기술적 이유로 지연된 것이다. 지난해에도 같은 이유로 48분을 넘겨 지각 처리한 예산이다 보니 국회예결위가 “국회선진화법 도입이후 3년간 연속법정 처리시한을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에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탄핵정국과 촛불민심의 시국에서 이번 예산국회가 얼마만큼 충실하게 예산심의를 했는지는 국민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년도예산 중에서 복지예산(보건·노동 포함)이 130조원으로 전체 예산의 3분의 1이라는 사실은 국민복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인즉, 국민에게 실질적 혜택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집행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가운데도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지방과 마찰을 일으켜온 누리과정(3~5세 무상보육) 예산 8600억원이 확보돼 지방자치단체와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었다는 것이 특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예산은 혈세가 기반이므로 국민의견도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이 사상 처음으로 25%를 넘어선 현실에서, 비록 저성장에 맞서 ‘확장적 재정운영’을 기조로 해 내년도 정부예산이 짜여졌다고 하지만 일반 가정과는 다르게 지출을 수입보다 우선하다보니 건전재정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400조 슈퍼예산시대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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