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지난해 말부터 불어 닥친 국정 혼란은 연초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탄핵소추로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후 그 권한이 헌법규정에 따라 황교안 국무총리에 의해 대행되고 있기는 하나 정상 국정이 이뤄지긴 어렵다.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국내문제뿐만 아니라 미·일·중 등 초강대국과의 현안문제들이 불거져 극심하게 내우외환을 겪고 있는 셈인데, 헌법재판소에서 심리중인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과가 잘 정리돼서 하루 빨리 나라가 안정돼야 하겠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난관인 국면에서 정치문제마저 불거져 우리 사회 전체가 홍역을 앓고 있다. 실업률이 4%대로 늘어나 실업자가 110만명이 예상되는 가운데, 생활물가는 올라가 서민들의 삶에 궁핍의 그림자가 점점 길게 드리워지는 마당에 경제성장률마저 2%대로 떨어지는 등 먹고사는 문제가 어렵다. 이처럼 국내문제가 산적해있는 상황에서 사드문제로 중국이 압박을 가하고, 일본에서는 부산의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주한미군과 관련해 방위비 부담 증가를 요구한다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한마디로 근심거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형국이다. 이 같은 내우외한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현상을 보며 아무래도 우리 정치풍토가 근시안적인 데서 기인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치지도자들이 국민이 걱정하는 바를 미리 짚어 선진정치, 위민정치를 펼쳤다면, 작금에 문제시돼 온 여러 가지 정치·경제적 폐해들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막막한 탄핵정국과 사회적 혼란상은 결국 정치지도자들의 제 할 일들을 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일 터, 크게 본다면 헌법상에 나타난 여러 가지 권력 문제점을 미리 상정(想定)하지 못한 데에도 있으리라.

내우외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국내현실에서 ‘남왜북로(南倭北虜)’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아마도 내가 즐겨보는 TV 히어로에서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영웅 척계광’의 영향인 것 같다. 이 용어의 풀이 그대로는 ‘남쪽 왜구(倭寇)와 북쪽 오랑캐’라는 뜻인바, 내포하고 있는 핵심 의미는 ‘근심거리’다.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척계광(戚繼光)은 중국 명대의 명장이니 응당 명나라 때 이야기로 그 시대 백성들이 궁핍했고 곤궁을 겪었던 원인에는 혼군(昏君)과 간신들의 득세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근심거리 제공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는 게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나라도 신라 때나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숱하게 왜구의 침입을 받아왔지만 중국은 더 심했다. 중국에서는 왜구뿐만 아니라 북쪽지방 몽골의 여러 부족들이 수시로 변경을 침입해 피해가 컸는데 여러 왕조 중 가정제(1521~1567) 때가 가장 심했으니 그럴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다. 가정제(嘉靖帝)는 명나라의 제11대 황제로 즉위 초기에는 조정 일을 열심히 보았으나 도교에 빠져 차츰 열의가 식어갔다. 40년 넘는 집권에서 20년 이상의 세월동안 궁중에서 신선놀음이나 하면서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니 혼군의 이름이 딱 어울리는 황제였다.

게다가 그 당시 재상은 엄숭(1480~1567)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간신’이라 불린 인물이다. 엄숭은 진사에 급제해 등용됐고, 특히 여러 귀신들을 종류에 따라 청하며 부르는 소리인 청사(請詞)를 잘 써서 가정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희대의 혼군과 간신의 만남이라는 특이한 인과응보가 함께 엮어져 있었던 때이니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조정은 부정부패로 문란했고 백성은 피폐했으니 나라가 망할 징조로서 필수충분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그나마 당시 명나라가 바로 망국하지 않고 5대 황제 70여년이 이어진 바탕에는 척계광이란 명장 덕분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본다. 사실 드라마 ‘영웅 척계광’을 보기 전까지는 척계광이라 하면 남송의 악비(岳飛)장군 같은 명장이라는 정도로 알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중국에서는 척계광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척가군이 1555년에서 1567년까지 10여년 동안 왜구와 80여 차례 전투를 했고, 명나라의 근심이 됐던 왜구를 완전히 몰아내고서는 북쪽의 몽골 부족까지 물리침으로써 외환을 송두리째 잠재운 일등 공로자가 다름 아닌 척계광이었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통해, 또 역사적 사실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중국 명나라 가정제가 재임했던 시기는 심각한 정치혼란기였다. 혼군에다가 엄숭이라는 간신배가 조정을 좌지우지한 때라 내정이 문란했고, ‘남왜북로’가 기승을 부려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다. 이 시기에 다행히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했던 멸사봉공의 주인공, 척계광 장군이 그나마 존재한 덕분에 남왜북로의 외환의 장막은 거두어질 수 있었으니, 나는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역사 속의 필연성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의 내우외환을 걱정해본다.

안팎으로 우환이 겹치는 혼탁한 시국이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답시고 나대는 이율배반적 정치지도자를 보며 이 난세에서 나라와 국민만을 진정 위하는 영웅이 과연 나타나려나. (다음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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