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와 4만명을 고용하기로 했다. 지난 201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복귀 이후 내놓은 발표보다 60조원이나 증가한 수준이다. 이는 이 부회장이 가석방 후 11일 만에 내린 결단으로, 정·재계에서 거론되는 ‘이재용 역할론’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위기 때마다 대규모 투자로 경쟁 업체를 압도하는 삼성의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엘지전자와 삼성전자에서 각각 근무한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 육성 경영전문 컨설턴트 박광수 칼럼니스트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이 질문에 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전직 삼성맨의 삼성이야기

<11> 삼성 핵심임원 복귀시킨 전두환

LG부터 삼성·대우 등 전자산업 본격

경쟁사간 뺏고 뺏기는 인재 쟁탈전

삼성 핵심임원 김광호, 이병철과 갈등

인사 불만에 金 사표내자 현대서 채용

이병철, 전두환에 “정주영, 다 빼앗아”

정주영 靑 부른 全, 김광호 복귀 지시

윤종용도 이건희 호소에 삼성 돌아와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이 1983년 경기 기흥 반도체 공장터를 방문해 김광호 부회장(앞줄 맨 오른쪽)에게 지시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앞줄 왼쪽 두 번째)도 보인다. (출처: 삼성전자)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이 1983년 경기 기흥 반도체 공장터를 방문해 김광호 부회장(앞줄 맨 오른쪽)에게 지시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앞줄 왼쪽 두 번째)도 보인다. (출처: 삼성전자)

국내 전자사업의 시작은 1959년 금성사(현 LG전자)가 라디오를 생산하면서다. 이를 미래 먹거리로 판단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사돈 기업인 금성사의 반대에도 1969년 전자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수원시에 대지 40만평을 매입하고 공장 건설에 나선다.

사업 초기 기술이 없던 삼성은 일본 산요사와 합작해 TV를 생산했다. 자사 인력을 산요사에 파견해 기술을 습득시키고, 점차 스스로 기술을 키워나가는 형식이었다. 이 가운데 부족한 인력은 LG전자에서 빼내 채용하기도 했다.

◆전자사업과 함께 시작한 인재 경쟁

경쟁사들의 인재 스카우트 전쟁은 1983년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대한전선의 가전사업 부문을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세우면서 본격 활성화한다. 당시 삼성, LG에서 고급 인력을 빼가는 스카웃 파동은 이들 회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경쟁사의 핵심 인재들을 채용한 대우전자는 당시 20%에 달하는 국내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유럽 시장에서는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983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전자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 메모리사업을 시작한다. 재계 1, 2위를 다투던 삼성과의 경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이에 이병철 회장은 정 회장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현대건설과 중공업, 자동차 사업 등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쏟아 부으며 이천에 50만평 대지를 구입하고 반도체 공장 건설에 나선다.

당시 현대그룹은 사업 초창기 미국 반도체 회사에 근무 중이었던 천동우 부사장(후일 LG반도체 부사장 역임)을 영입해놓고, 삼성전자 반도체에서 핵심 기술 인력 20명을 빼내며 토대를 구축해갔다. 겉으로는 경력 사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내기도 했지만 이는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현대전자는 당시 삼성의 대리직급은 과장으로, 과장급은 차·부장급의 직책을 주고 급여도 본인이 희망하는 대로 협의를 봤다. 당시 현대전자는 일반적인 호봉제를 채택하지 않고 연봉제와 비슷한 제도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자본 사회에서 핵심 인력 누출은 막을 수 없는 일. 현대전자는 이 같은 인력에 힘입어 삼성전자보다는 1년 늦었지만 64K DRAM을 개발하며 삼성전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이 가운데 LG그룹도 반도체 분야 진출을 선언했었으나 박대한 자금 투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돌다리도 두드리고 가던 보수적인 경영 분위기 때문인지 곧 포기한다.

◆이병철 회장과 갈등 속 이직한 핵심 임원

삼성전자를 떠나 다른 경쟁사에 갔다가 다시 복귀한 핵심 임원인 김광호 부회장(왼쪽)과 윤종용 부회장.
삼성전자를 떠나 다른 경쟁사에 갔다가 다시 복귀한 핵심 임원인 김광호 부회장(왼쪽)과 윤종용 부회장.

핵심 인력 누출 갈등의 정점은 1987년 현대전자에서 삼성전자의 김광호 부회장을 ‘십고초려’ 끝에 스카우트하면서 발생한다. 김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 당시부터 함께 시작한 삼성전자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임원이었다.

또한 그는 1983년경 전두환 대통령이 삼성반도체 부천 공장 방문했을 때 직접 브리핑을 하면서 전 대통령이 반도체를 이해하게 만들며 이후 일본 장비 수입 관세 완화와 자금 대출 등의 지시를 이끌어내 핵심 중에도 핵심 임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외에도 김 부회장은 기흥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때 비가 오는 날에도 워커를 신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건설 현장 곳곳을 누비며 관계자들을 격려하면서 6개월 만에 공장 건설을 완성시킨 주역으로 꼽혔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1986년쯤부터 이병철 회장과 자주 의견 충돌이 발생하면서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된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현대와 LG 등 경쟁사의 반도체 사업 전망에 비관적이었는데 김 부회장은 “방심하면 안 된다, 경쟁사들도 우수 인력이 있고 곧 삼성을 뒤쫓을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계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오히려 역정을 내며 “절대로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병철 회장은 1987년 임원 정기인사에서 반도체 성장에 중심 역할을 하던 당시 강진구 사장을 통신담당 사장으로, 반도체사업에 문외한인 제일모직 출신의 송세창을 반도체부문 대표이사로 이동시킨다. 당시 인사이동에 불안을 느낀 김 부회장은 사표를 제출하고 자택에서 칩거에 돌입한다.

이 같은 소문을 들은 현대전자에서는 앞서 역시 삼성에서 스카우트 된 남궁석 당시 전무(후일 삼성전자 대표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역임)의 적극 추천으로 정몽헌 대표이사가 김 부회장을 수차례 만나 설득을 했지만 삼성의 경쟁사로 이동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통이 크기로 유명한 현대 정주영 회장이 직접 나서게 되는데 정 회장은 김 부회장에게 이천 반도체공장에 대한 경영권 100%와 원하는 대우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받아들인 김 부회장은 삼성 비서실에 마지막 인사차 방문해 자신의 이름이 삼성전자 임원 명단에서 빠진 것을 확인하고는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 와중에 당시 형식적인 부회장 역할을 하던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께 진언을 하고 복귀할 수 있도록 할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 사표는 반려하겠으니 업무에 복귀를 해 달라”고 김 부회장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김 부회장은 “나는 이미 이병철 회장의 신임을 잃었다. 복귀를 한들 사표를 던진 내가 다시 가서 제대로 일할 수는 없다”며 뜻을 고수한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지금 업무에서 손을 떼고 나가면 삼성의 반도체사업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재고를 간청하지만 김 부회장은 끝내 이 제안을 거절하자 “평양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안 간다”는 속담을 언급하며 현대전자에서 일을 하다가 마음이 마뀌면 언제라도 돌아올 것을 요청한다.

현대전자 반도체 총책임의 자리에 앉은 김 부회장은 당시 난무하던 의견을 한 방향으로 통일 시키고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256K DRAM을 현대전자에서 생산해 납품하는 오더를 받아오는 등 성과를 보인다.

(출처: 연합뉴스, 뉴시스)
(출처: 연합뉴스, 뉴시스)

◆“정주영이 돈이 그리 많아 삼성 인재 빼돌리나”

하지만 2주일 만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이 같은 상황을 뒤늦게 보고 받은 이병철 회장이 후회를 하면서 전 대통령을 찾아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정 회장이 김 부회장과 삼성 핵심 기술자들을 돈으로 빼돌리고 있다고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김만제 당시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나웅배 상공부 장관, 이원재 은행감독원장 등을 불러 “정주영이 무슨 돈이 그리도 많아서 삼성 핵심 임원들을 스카우트했느냐”고 노발대발 화를 내며 정 회장을 청와대로 부른다. 전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성에서 현대로 간 24명은 한국에서 더는 일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이원재 원장에게 은행감독원 부원장이 김 부회장의 형임을 언급하며 당장 부원장도 자르라고 지시한다.

이 같은 상황을 들은 김 부회장은 다음날 오전 7시경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그룹 사옥 정 회장을 만난다. 앞서 나온 김 부회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도 들었다”고 말하는 정 회장의 얼굴에는 노기가 잔뜩 서려있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에 대한 전쟁 선포가 임박했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 대통령의 지시 등을 고려해 정 회장은 김 부회장을 2주일 만에 복귀 시키고, 이에 ‘스카우트 파동’은 마무리된다.

한편 이건희 회장은 가전분야 핵심 멤버 윤종용 부회장이 유럽 최대 가전회사인 네덜란드 필립스에서 스카우트 한 것을 알아내고 그를 만나 설득해 다시 삼성에 돌아오게 한다. 두 임원은 삼성 복귀 후 승승장구 승진을 하고 총괄 부회장, 대표이사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다.

이후 삼성전자는 퇴직 임원의 경쟁사 이직을 막기 위해 퇴직을 해도 직책에 따라 2~3년 별도의 사무실과 공동비서를 제공하면서 급여를 지불하는 제도를 정립했다. 또한 퇴직 임원에게는 아이템을 발굴하고 본인의 사업을 꾸릴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정리 = 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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