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와 4만명을 고용하기로 했다. 지난 201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복귀 이후 내놓은 발표보다 60조원이나 증가한 수준이다. 이는 이 부회장이 가석방 후 11일 만에 내린 결단으로, 정·재계에서 거론되는 ‘이재용 역할론’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위기 때마다 대규모 투자로 경쟁 업체를 압도하는 삼성의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엘지전자와 삼성전자에서 각각 근무한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 육성 경영전문 컨설턴트 박광수 칼럼니스트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이 질문에 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해외주재원 및 관련 분야를 망라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전직 삼성맨의 삼성이야기

<6>  평창올림픽을 유치하라

비자금 폭로 사건에 삼성 대위기

‘징역 3년’ 이건희 회장 특별사면

“3번째 도전 평창올림픽 유치해야”

 

업무 절반은 올림픽 유치에 집중

1년간 출장 11번·지구 5바퀴 돌며

IOC 위원들 성격까지 파악해 설득

獨·佛에 압도적 표 차이로 승리해

이건희 “나는 작은 부분만 했다”

2011년 7월 6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발표되는 순간 이건희 회장의 감격에 찬 모습. (출처: 뉴시스)
2011년 7월 6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발표되는 순간 이건희 회장의 감격에 찬 모습. (출처: 뉴시스)

어린 시절 일본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였던 레슬링 경기를 즐겨봤다. 귀국 후에도 이건희 회장의 레슬링에 대한 관심은 이어져 고교 시절에도 레슬링 선수로 전국체전에 참가해 입상도 하고 각종 스포츠(골프, 탁구, 럭비 등)에도 두각을 보였다. 결국 레슬링협회 수장까지 지낸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올림픽의 최대 후원사가 되면서 1996년에는 자연스럽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된다.

◆‘비자금 폭로’ 최대 위기… 올림픽 유치로 사면

한국 스포츠 외교의 선두 역할을 해 나가던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은 곧 최대 위기를 맞게 되는데 2007년 삼성그룹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폭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일파만파로 퍼져 당시 검찰은 특검팀을 신설, 삼성그룹 주요 사장급 임원들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2년 후 결국 법원은 이건희 회장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회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히며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으니 저의 지시로 이 일에 관련된 삼성 임원들의 선처를 바란다”고 울먹이며 호소했다. 이를 보던 필자 역시 함께 눈물을 글썽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개인 소견이지만,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한국 경제계에 큰 손실을 가져온 당시의 사건과 양심고백이 과연 타당한 행동이었는지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이후 4개월 만인 2009년 12월 31일 정부가 이건희 회장에 대한 원포인트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당시 사면심사위원회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보다 나은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사면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도 체육계와 강원도민, 경제계의 청원에 따라 국가적 관점에서의 사면임을 강조하며 이건희 회장에게 앞서 두 차례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반드시 올림픽 유치에 승리할 것을 주문했다.

평창이 두 번의 고배를 마셨으나 당초 아시아 국가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는 쉽지 않았다. 서방 국가들에서 더 사랑을 받는 종목들이 많은 데다 한국은 여러 조건상 동계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제1회 동계올림픽이 열린 이래 총 21번의 동계 대회 중 아시아 개최국은 일본이 유일했다.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발표식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이 악수하며 자축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도시 발표식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이 악수하며 자축하고 있다. (출처: 뉴시스)

◆세계를 돌며 IOC 위원들을 설득하다

그러나 2010년 3월 주주들의 지지로 삼성전자 회장직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업무의 절반을 평창올림픽 유치에 집중하며 다시 적극 나선다.

또한 이건희 회장은 둘째 사위인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던 대한빙상연맹에도 막대한 후원을 통해 쇼트트랙 위주의 동계스포츠 종목에서 벗어나 피겨와 스피드스케이팅 유망 선수를 적극적으로 발굴·지원했다. 김연아,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선수 등이 평창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포함해 최고의 성적을 거둔 데에도 이 같은 후원의 영향도 있으리라 본다.

이건희 회장은 사내 방송을 통해서도 평창올림픽 유치에 대한 열정을 나타냈다. 그는 “한국이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유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역할이 컸다”며 “정 회장이 세계 각국을 여러 차례 순회하고 발로 뛰면서 IOC 위원들을 만나고 현대그룹의 전 세계 주재원들을 총동원해 민간외교를 한 결과”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삼성도 이에 못지않은 결과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거듭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 역시 당시 69세의 고령에도 1년간 11차례 해외 출장길에 나섰다. 그는 거리로는 21만㎞, 170일 동안 지구 5바퀴를 돌며 전 세계 각국의 IOC 위원들 110명을 일대일로 만나 평창올림픽 개최의 당위성을 알리고 그들을 설득했다. 특히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는 위원들은 한 명당 다섯 번 이상 만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건희 회장이 이처럼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건강에 무리가 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이건희 회장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와 같이 “내 생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 죽는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냐”면서 주치의를 대동하면서까지 출장길에 나섰다.

이건희 회장의 노력과 함께 삼성의 글로벌 파워도 유치 성공에 한 몫을 했다.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던 정부 관료는 “역시 삼성”이라며 삼성의 힘을 체험했다는데 예를 들어 이건희 회장이 위원들에게 만남 제의를 하면 선약이 있더라도 이를 취소하고 그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삼성은 전 세계 234개국에 주재원들을 파견하는 등 세계 전역에 포진해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과거 정 회장과 같이 각국 주재원들의 인맥을 총동원해 IOC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개인의 성격과 습관까지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2011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평창올림픽 유치 관계자들이 만찬을 위해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김윤옥 여사,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건희 회장, 김연아 선수, 조양호 유치위원장, 박용성 KOC 위원장. (출처: 뉴시스)
2011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평창올림픽 유치 관계자들이 만찬을 위해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김윤옥 여사, 이명박 당시 대통령, 이건희 회장, 김연아 선수, 조양호 유치위원장, 박용성 KOC 위원장. (출처: 뉴시스)

◆세 번째 도전 끝 승리… 눈물 보인 이건희

이같이 유치를 차근히 준비해 온 이건희 회장은 2011년 7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IOC 총회가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으로 간다. 이건희 회장은 이 대통령에게 개최국 설명을 반드시 영어로 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이 대통령 역시 이를 받아들이면서 더반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목이 쉴 정도로 영어 강연을 연습했다는 후문이다.

더반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IOC 위원들을 만나며 발로 뛰었고, 드디어 삼성맨들의 정보망에 유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막판 스퍼트를 낸다. 당시 독일 출신인 토마스 바흐 IOC 부위원장(현 위원장)도 독일 뮌헨이 개최국 신청을 하면서 IOC 위원들을 만나며 표밭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목표는 총회 당일 1차 투표에서 표차를 벌려 결승을 내자는 것이었다. 결국 이 전략은 통했다. 전체 95표(유효표) 중 평창이 63표를 얻으면서 25표를 받은 독일 뮌헨, 7표에 그친 프랑스 안시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이겼다.

당시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PYEONG-CHANG 2018”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고 “평창!”이라고 외쳤던 장면은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11년 7월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PYEONG-CHANG 2018”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고 “평창!”이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트위터 캡처)
2011년 7월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PYEONG-CHANG 2018”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고 “평창!”이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트위터 캡처)

평창의 승리가 확정되자 이건희 회장은 눈물을 보였다. 그의 인생에서 최대 위기를 이겨내고 가져온 결과물이었기에 감정이 더 격해졌던 듯했다. 이건희 회장은 평창 유치 소감을 묻는 질문에 “모두 저보고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승리다”며 “특히 경제인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열심히 했다. 나는 작은 부분만 담당했을 뿐이다”고 몸을 낮췄다.

훗날 이건희 회장은 평창 유치가 확정되던 때가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회고한다. 혼신의 힘을 쏟고 마침내 결실이 맺히는 자리에서도 모든 공을 다른 이에게 돌리는 이건희 회장은 대한민국 기업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국민의 가슴 속에도 깊숙이 존경받는 기업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리 = 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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