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와 4만명을 고용하기로 했다. 지난 201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복귀 이후 내놓은 발표보다 60조원이나 증가한 수준이다. 이는 이 부회장이 가석방 후 11일 만에 내린 결단으로, 정·재계에서 거론되는 ‘이재용 역할론’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위기 때마다 대규모 투자로 경쟁 업체를 압도하는 삼성의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엘지전자와 삼성전자에서 각각 근무한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 육성 경영전문 컨설턴트 박광수 칼럼니스트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이 질문에 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전직 삼성맨의 삼성이야기

<3>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한 삼성전자

이건희 “삼성미래는 반도체에 有”

6개월 만에 64K D램 개발 성공

세계 반도체 기업들 ‘간담 서늘’

 

10년 만에 메모리반도체 1위 수성

日·美 기업 콧대 납작하게 만들어

133조원 투자로 모든 분야 1위 노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4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해외주재원 및 관련 분야를 망라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는 TV,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 일상에 필수적인 전자통신기기 대부분에 중요부품으로 사용된다. 최근에는 스마트 자동차 제조에 투입되는 반도체가 부족해 자동차 생산을 적기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중요한 부품이 됐다.

반도체(semiconductor)는 도체나 진공에서만 다니던 전자가 완전 도체도 부도체도 아닌 그 중간 즉 semi(반)+conductor(도체)라는 고체 안에 존재한다는 합성어다. 1947년 12월 23일 미국 벨 연구소에서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반도체의 효시로 알려진다.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이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을 방문해 방진복을 입고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출처: 뉴시스, 삼성전자)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이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을 방문해 방진복을 입고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출처: 뉴시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사비로 시작한 반도체 사업

한국에서의 첫 반도체는 미국 모토롤라와 벨 연구소에서 근무한 강기동 박사와 강대원 박사가 설립한 한국반도체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반도체는 열악한 경제 상황에 맞물리면서 적자를 거듭하다가 도산 위기에 몰렸다.

삼성의 미래는 반도체 사업에 있다고 판단한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는 부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경영하자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반도체 제조가 가능하냐”는 반대에 부딪혔다. 이병철 회장이 아들의 제안을 거부한 데에도 이유는 있었다. 국내 시장 상황과 수출 경쟁력, 기술 경쟁력 등이 아직 열악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희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본인 소유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 만든 자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건희 부회장의 꾸준한 설득은 마침내 미국 방문 길에서 받아들여진다.

1982년 이병철 회장이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기위해 미국에 방문한 기간 이건희 부회장이 그에게 IBM, 휴렛팩커드(HP) 등 첨단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을 안내하면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재차 권유했고 이 설득이 통한 것이다. 미국에서 반도체의 미래를 본 이병철 회장은 다음 해 2월 일본 동경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발표한다. 그 유명한 ‘동경 선언’이다.

“세계 각국의 장기 불황과 보호무역의 강화로 대량 수출에 의한 국력 신장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 삼성은 자원도 거의 없는 우리의 자연조건에 적합하면서 부가가치가 높고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제품 개발에 부응하게 됐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상징성이 클 뿐 아니라 파급 효과도 지대하고 기술 및 두뇌 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1983년 1월 삼성전자 경영방침 발표회.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다음 달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2.8 동경선언’을 발표하고 반도체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출처: 도서 삼성전자이십년사(1989))
1983년 1월 삼성전자 경영방침 발표회.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다음 달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2.8 동경선언’을 발표하고 반도체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출처: 도서 삼성전자이십년사(1989))

◆직원들 밤샘 노력… 6개월 만에 성과

이후 미국 마이크론과 일본 도시바에 기술료를 지불하고 삼성전자 엔지니어를 파견해 기술 습득을 시도했으나 기술 유출을 우려한 기업들의 강력한 제지로 실패한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일본 기업들(도시바, 히다치, 일본전기, 미쓰비시 등)은 삼성전자를 깔보고 “만약 삼성전자가 64K D램(Dynamic Random Access Memory)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취지로 코웃음을 쳤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굴복하지 않고 기존 보유 반도체 개발 인력에 국내 우수한 전자 인력까지 보강해 64K D램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는 타이밍 싸움이라는 경영 판단으로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부지를 매입, 공장 건설과 개발을 병행했다.

당시 반도체 제조 장치를 기흥 사업장에 설치하는데 이는 진동에 민감한 장치였다. 이에 삼성건설 전 직원들이 밤샘 작업을 해 울퉁불퉁한 도로를 평평하게 다져 안전한 통로를 만들어 장비를 공장까지 무사히 옮기게 됐다.

공장 건설에 돌입한 지 6개월여 만인 1984년 3월. 드디어 기흥공장 1차 라인이 완공돼 반도체 가동을 시작한다. 일본 기업은 최소 18개월 이상 걸리는 공장 건설을 한국인의 ‘빨리 빨리’ 정신으로 무장한 삼성인들이 주야 24시간 일하며 순식간에 완공시키자 국내 안팎에서는 삼성의 저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개발한 64K D램. (출처: 삼성전자)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개발한 64K D램. (출처: 삼성전자)

앞서 개발팀의 노력도 상상이상이었다. 이들은 개발에 성공할 때까지 개인 생활은 모두 포기한다는 불굴의 의지로 회사 내 야전 침대를 설치하고 업무에 박차를 가하면서 집에는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 들어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크게 8가지 공정(표 참고)을 포함, 약 309가지 쉽지 않은 공정을 모두 성공해야 제조할 수 있는 반도체. 개발팀은 수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83년 12월 1일 6개월 만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64K D램 개발 성공 보고를 받은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에 현장에 달려가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다, 여러분들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현장은 삼성인들의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 기업이 6년 만에 성공한 반도체 개발을 삼성전자는 6개월 만에 해낸 것이다. 이 놀라운 성과는 일본 도시바, 히다치 등 외국 반도체 회사들의 거만한 콧대를 납작하게 하고도 충분했다.

반도체 사업에서 앞서나갔던 일본 도시바, 미쓰비시, NEC(위에서부터). 이들 기업은 10년 만에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삼성에게 추월당했다. (출처: 각 회사 홈페이지)
반도체 사업에서 앞서나갔던 일본 도시바, 미쓰비시, NEC(위에서부터). 이들 기업은 10년 만에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삼성에게 추월당했다. (출처: 각 회사 홈페이지)

◆반도체 전 분야 1위 노리는 삼성

이후 바로 삼성전자는 이병철 회장의 지시대로 256K D램 개발을 1983년 말에 착수해 7개월여 만에 개발에 성공, 다시 한 번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놀라게 만든다. 256K D램은 삼성전자 매출의 첫 효자 상품으로 등극,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파는’ 반도체가 된다.

또한 삼성전자는 미국 반도체 회사에 근무 중이었던 뛰어난 인재인 진대제 박사(이후 삼성전자 대표이사, 정보통신부 장관 역임)를 삼고초려와 같은 노력 끝에 영입에 성공한다. 1986년에는 1M D램 개발에 성공, 4M D램, 16M D램을 병행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다.

당시 반도체 설계 기술은 크게 2가지로 나뉘었다. 공정이 복잡하고 원가가 많이 들어가는 트랜치(tranch) 방식(도시바, 일본전기, 히다치, IBM, 텍사스인스트루먼트)과 위험부담은 크지만 원가가 저렴한 스택(stack) 방식이다. 이건희 부회장은 당시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스택 방식을 과감히 선택, 개발을 지시해 세계 최초로 스택으로 반도체 개발을 성공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모습 (출처: 도서 삼성전자이십년사(1989))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모습 (출처: 도서 삼성전자이십년사(1989))

또한 웨이퍼가 6인치인 당시 대량 생산 방식을 탈피해 삼성은 세계 최초로 8인치 웨이퍼로 16M D램(1990년 출시)과 64M D램(1992년 출시) 대량 생산까지 성공하게 된다.

1993년, 삼성전자는 전 세계 D램 시장에서 1위에 오른다. 반도체 사업 진출 10년 만이다.

삼성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로는 일본 소니의 회장이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제조 시 메모리칩이 없어 직접 한국 삼성전자까지 찾아가 메모리칩 공급을 호소한 적이 있다는 데서 명백히 나타난다. 삼성전자는 탄력을 받은 메모리 사업에 집중 투자를 했고 다음 해 256M D램까지 출시하면서 현재까지 반도체 메모리시장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사업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는데 세부적으로는 연구개발(R&D) 분야에 73조원, 최첨단 생산 인프라에 6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천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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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는 평택 1공장에 파운드리와 메모리반도체를 포함한 생산라인을 증설하면서 평택 2공장에는 4만 3천장 규모의 5㎜ 라인을 계획 중이다. 여기에 미국 오스틴 공장에도 파운드리 생산 라인을 증설하고 19조원 규모를 투자하며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잡겠다는 방침이다.

파운드리(Foundry)란 CDMA칩을 개발한 미국 퀄컴과 컴퓨터 CPU칩을 설계한 인텔사와 같은 설계 전문 회사로부터 반도체 제조를 위탁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전문 기업을 말한다. 파운드리는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이다. 모바일 시장과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시장 등에서 다양한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면서 파운드리 시장은 급격히 커지는 추세다.

현재 파운드리 1위 기업은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Limited)로, 매출액은 2020년 기준 479억 5천만 달러에 달한다. 향후 계획대로 반도체 투자가 순조롭게 진행돼 삼성전자가 반도체 모든 분야(메모리, 비메모리, 파운드리)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길 기대해본다.

(정리 = 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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