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눈보라가 매서운 혹한의 겨울. 임진전쟁 중 선조는 군사들의 사기를 점검하고 싶었다. 임금은 근신들을 대동하고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간다. 임금의 방문을 받은 군영에서는 부랴부랴 군사들을 모아 세웠다.
그런데 군사들을 바라본 선조는 말문이 막혔다. 그들은 이제 갓 어린이 티를 면한 소년들이었다. 임금은 “이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어린 병사들의 찬 손을 어루만지고 이들이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눈 폭설에 대비한 장구를 하사하곤 돌아선다.
이 고사는 조선 군정(軍政)의 문제를 여실히 증명하는 기록이다. 조선은 이런 군사들을 데리고 현해탄을 건너 온 왜군을 막으려다 일시에 나라가 쑥대밭이 됐다. 2000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보물들은 모두 약탈당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조선국의 병제는 당(唐)의 부병제를 모방해 16~60세까지의 양인들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라에 면포(綿布)를 지급하면 군역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재산이 있는 자는 군대를 가지 않았지만 없는 자는 군대를 가야 했다. 이것이 소위 균역법(均役法)이란 것이다.
가난한 가정은 관아의 면포 독촉을 피하기 위해 유랑 걸식의 길을 택했다. 심지어는 국부를 거세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엄마의 품을 겨우 면한 가난한 어린 소년들이 장정이랍시고 군사로 끌려갔으니 이런 개탄스런 역사가 어느 나라에 있을까.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율곡은 ‘조선은 나라가 아니며 기둥과 서까래가 썩어 붕괴 직전’이라고 개탄했다.
“국력의 쇠약함이 심한지라 10년도 못 가서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10만 병졸을 미리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 그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무재(武才)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눠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변란이 있으면 10만명을 합쳐서 지키게 해 위급할 때 방비를 삼아야 합니다.”
율곡의 10만 양병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임진전쟁의 역사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일시 일본군에게 밀렸어도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런데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고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군정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더욱 문란하게 된다. 순조~고종 대에는 매관매직으로 수령이 된 탐관들에게는 축재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30여년 전 한 고서 수장가 집에서 발견된 ‘평양기생초월상소문’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료였다. 순조 때 16세 용천 기생 초월은 ‘군정’의 비리를 임금에게 상소한다. 모든 것을 임금의 책임으로 물기까지 했으니 목숨을 내놓은 간언이었다.
나약한 임금들은 이런 부정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전라도 고부 민중봉기를 불러일으켰고 서방열강과 신흥 일본의 세력을 막지 못해 끝내는 나라를 잃는 악순환을 당하게 된다. ‘군사가 강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율곡의 예언이 또다시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 나라의 국방력은 나라의 존망과 관계되며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새누리당 소속 김영우 국방위원장이 병역면제자들에게 ‘병역세’를 부과할 것을 제안, 논란이 되고 있다.
병역세 제안이 혹 부유층의 병역기피 수단으로 전락되지는 않을까. ‘무전징집 유전면제(無錢徵集 有錢免除)’가 되어 국민적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지금도 외국유학을 빌미로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을 면제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4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에는 고위공직자 자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군정의 문란’은 나라의 안위를 흔든다. 면포를 내면 군대를 면제시켰던 조선의 나약함이 재현돼서는 안 된다. 국민 개병제의 근간을 흔드는 논의는 국가 안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북한은 연일 핵으로 한반도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팽창으로 동북아의 안위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국회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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