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라 왕도 ‘서라벌’은 본래 나라 이름이었다. 새로운 나라 ‘사라’에서 따온 것으로 신라(新羅)라는 명칭은 한문 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국가가 일개 지역에서 1천년이나 왕도를 지킨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왕도 서라벌은 동경(東京)이라고도 불렀다. 신문왕대 수도가 너무 동쪽에 치우쳐 5소경을 설치하고는 방위개념으로 이 같은 별칭을 붙였다. 서라벌 시대 동경은 어떤 도시였을까. 한 연구 논문을 보면 당시 인구는 약 60~80만명에 달했으며 중국 고대 장안성을 모방한 잘 짜여진 계획도시였다고 한다. 초가집이 없었고 굴뚝까지 만들지 못하게 했으니 얼마나 미관에 신경을 쓴 도시였을까.

월성은 1천년간 역대 신라의 왕과 비빈들이 거처했던 수도의 센터였다. 인근에 태자가 살았던 동궁전인 임해전이 있고 동양 최대의 가람 황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월성 안에는 선덕여왕 시기 만들어진 신라 천문과학의 상징 첨성대가 서 있다. 여왕은 사후에도 월성 곁을 떠나기 싫었던 것일까. 궁성이 내려다보이는 도리천에 영원히 잠들었다.

그런데 천년 왕도에는 영화만이 있을 수 없었다. 경주박물관 정원에 안치돼 있는 20여구 목 없는 불상의 잔해를 보면 천년 왕도의 수난사를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다.

지난 1965년 문화재 당국이 경주 분황사를 발굴했을 때 우물 안에서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불들을 다수 건져냈다. 이 석불들은 모두 머리가 없었다. 몽고군이 서라벌을 불태우면서 자행된 만행이었을까, 아니면 조선 개국 당시 억불정책의 산물이었을까.

어느 학자는 불상의 수난을 다르게 해석했다. 왕도 서라벌에서는 지진이 많이 발생하여 불상이 도괴되면서 목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한 논문을 보면 신라 초기부터 10세기 고려에 복속되기 전까지 지진은 모두 102회나 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도 ‘태종무열왕 4년(AD 657) 7월에 경주 토함산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지고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혜공왕 15년(AD 779) 3월에는 지진으로 많은 집이 무너지고 100여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지진 등 천재지변을 겪고도 월성 안의 첨성대(瞻星臺)는 끄떡없었다. 선덕여왕의 발의로 1년을 의미하는 총 362개의 돌로 쌓아 올린 이 건축물은 14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냈다. 기초공사가 워낙 튼튼했으며 기단에서 상단까지 내부를 채우고 있는 작은 돌들이 지진을 이겨낸 비법이었다.

신라시대 건축물들은 지진에 대비한 내진설계가 대부분 감안됐던 것인가. 문화재 당국이 최근 월성 건물터를 발굴하면서 제일 아래층에서 차곡차곡 돌을 다져 만든 내진 유구를 찾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2일 밤 경주를 중심으로 발생한 지진으로 첨성대의 상층부가 기울어지고 불국사 다보탑 상륜부도 조금 어긋났다고 한다. 가옥파괴 균열 등 5천여건이 넘는 피해 사례 속에서 중요문화재의 손상은 경미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지진은 추석연휴 기간에도 3백여회나 여진이 계속되어 주민들을 불안케 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경주 인근의 핵발전소와 방폐장이다. 경주에서 직선거리로 27㎞밖에 되지 않으며 고리핵발전소는 50㎞ 떨어져 있다. 왜 하필 신라 천년 고도 가까이에 핵시설이 깡그리 운집하게 됐는지.

지진학자들은 과거 일본 후쿠시마 같은 지진이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반도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남 일대에는 여러 활성단층이 밀집해 있다고 한다. 언제 더 큰 지진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위기론에 걱정이 앞선다.

경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적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정부는 지금 서라벌 영화를 재현하기 위해 큰 예산을 들여 월성발굴과 황룡사 복원 등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서둘다 보니 고증 부재와 조급성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왜 그렇게 서두는가.

이번 지진을 계기로 어떤 재난에도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천년 왕도 서라벌을 지킬 수 있는 철저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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