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성도인 선양(沈阳)에 가면 장씨수부(张氏帅府)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이곳은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 최대의 군벌이었던 장쭤린(張作霖), 장쉐량(張學良) 부자가 살았던 사저로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과거 항일운동의 본산이기도 해서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한국여행업계에서도 선양의 관광코스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 이름은 하나같이 ‘장씨사부’라 부르고 있다. 필자도 여행사의 관광상품 소개 등을 보면서 장씨사부로 알았는데 지난여름 기회가 되어 다롄(大連)여행을 가는 길에 선양의 그곳에 들른 적이 있다.

막연히 장씨사부로 알고 그곳에 가보니 저택 입구에 장쉐량의 큰 동상이 서 있었고, 담벽에는 ‘张氏帅府’(장씨수부)라 새겨져 있었다. 그 글씨를 보고서 필자는 ‘사(師)가 아니라 수(帥) 자네’ 혼잣말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그 내용을 몰라 장씨사부라 알고 있건만 정확하게는 장씨수부인 것이다. ‘수’ 자 한자를 ‘사’ 자로 잘못알고 여태까지 장씨사부로 불러온 것이다. 아직도 한국여행사의 관광코스에서는 오용되고 있으니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쭤린, 장쉐량 부자는 항일운동가로 유명하다. 1928년 만주를 점령했던 일본 관동군에 의해 장쭤린이 피살되자 이듬해 장쉐량이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그 당시 장쉐량의 활약으로 일본인들의 만주지방에서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던 바,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운동 본거지가 바로 장씨수부였으니 현재에도 일본을 적대시하는 중국인들에게 그곳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라사랑의 터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장씨수부에 전시돼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당시 장씨 부자를 따르던 만주 일대 중국인들의 항일정신을 알 수가 있었다. 일본이 난징대학살, 만주사변 등에서 보인 중국인 학살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중국인들은 배일(排日)사상을 가지며 일본을 혐오한다. 그것은 일본 외교부가 조사한 설문조사 등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 중국인 중 41.7%가 일본에 대해 혐오한다고 답했으니 중국인들의 배일사상은 오래전부터 싹틔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일본보다는 한국에 대해 더 큰 호감을 가진다. 이런 현상은 일본에 피해를 본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장씨수부를 보고 느낀 점은 일본군에 저항한  장쭤린, 장쉐량 부자의 투철한 항일정신이었다. 그러한 극일(克日)정신은 한국인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의 중심지 선양에 자리한 항일 본거지 등을 둘러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독립운동가였고, 한때 이 지역에서 초창기의 대한독립운동을 시도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분 역시 장쉐량 못지않은 애국심으로 일본에 대해 항거했던 인물이 아니신가.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저술한 책이 백범일지(白凡逸志)다. 상·하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책 상편의 ‘기구한 젊은 때(2)’편을 보면, 선생이 황해도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해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한 동기와 초창기 활동이 나온다. 당시 김구 선생은 만주지방에서 이름이 나 있던 김이언, 김규현과 함께 비밀리에 의병을 모으고 활동을 전개한 내용들이다. 그러다가 더 큰 대의를 위해 1년 후 귀국하고서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의 장본인으로 생각해 일본인을 살해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됐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돼 풀려나왔다.

그 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구 선생은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선각심을 갖고 근대적 교육사업과 항일운동을 이어가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출옥하고서는 계속 농촌계몽을 전개했는데, 김구 선생은 일제로부터 박해를 받던 이 시절에 ‘백범(百凡)’이란 호를 썼다고 한다. ‘백정, 범부들(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의미로 백범이란 호를 지었다 하니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던 대인의 생각과 행동들이 그 호에서 고스란히 배어나고 있는데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이 이처럼 치열하다.

지난여름 필자는 선양의 장씨수부를 보며 만주지방의 항일 영웅, 장쉐량을 알았고, 그에 더하여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처음 시작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역만리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선각자들의 애국정신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됐거늘, 특히 막연히 알고 있었던 김구 선생의 호, 백범은 ‘평범한 사람들의 애국심이 역사를 바꾼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하니 선생의 선견지명과 애국충정은 역사에 길이 반추되리라. 모양새만 번지르르한 위정자들은 많지만 진정한 국가지도자를 만날 볼 수 없는 현실에서 ‘무지에서 깨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김구 선생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기면서 두고두고 곱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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