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왕국 ‘가야’를 잃어버린 역사라고 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기록들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중부지역 토착세력이었던 마한(馬韓)도 마찬가지였다. 가야사와 마한의 역사를 편찬했다면 고대사는 5국시대로 명명됐을 게다.

가야는 어떤 나라였고 또 언제까지 존속됐을까. 기록은 왜 전부 멸실됐을까. 고려사를 보면 11세기 문종 대까지 가야 역사서인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찾을 수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략한 기록이 전부다.

가야 역사는 기원전까지 올라간다. 낙동강 하류지역에 웅거했던 초기 철기시대 부족연맹으로 출범했다.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후의 로망으로 역사는 막을 올렸다.

‘가야’란 명칭은 ‘나라(國)’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유사에는 모두 여섯 개의 나라로 나오는데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비화가야 등이다. 가야는 또 다양한 명칭으로 표기되고 있다.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拘邪), 임나(任那)로 나온다.

가야의 수장격인 금관가야는 5세기 중반 강성해지는 신라와 대립하게 된다. 다량의 철기생산국이었던 가야였지만 여러 나라가 분산돼 있어 응집력이 약했다. 금관가야왕은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신라왕에게 사위가 될 것을 간청했다. 신라 법흥왕은 왕녀를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일본서기에도 기사가 나오는데 ‘따르는 자가 1백여명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다. 여기서 가야 왕실은 균열의 조짐이 보였다. 가야왕에게 시집 간 신라왕녀는 아들을 낳았으며 그 아들이 나중에 신라로 귀부를 결행하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이었던 구해왕(仇亥王)이다. 구해는 형제들과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신라에 귀부했으며 법흥왕은 상등(上等)의 지위로 대우하고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때 여러 가야국이 반기를 들고 신라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구해왕의 아들 무력은 용감한 전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외가인 신라왕실의 피를 받은 때문에 신라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으며 진흥왕의 신임을 얻어 신주 군주(軍主)로서 북방공략의 선봉장이 됐다.

무력이 한강유역에 진출했을 때 다수의 가야세력이 함께 이주했다. 이 시기 가야 출신 악사 우륵은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 있었는데 하림궁에서 진흥왕을 만나게 된다. 자칫 사라질 뻔 했던 가야금 음악이 진흥왕의 보호를 받아 크게 발전했다. 여지승람을 보면 충주가 ‘임나가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 가야인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 이렇게 붙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무력의 손자 김유신 장군은 화랑 출신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김 장군은 가야인이지만 어머니 만명부인은 신라왕녀였다. 진흥왕 동생인 숙흘종의 딸이었으니 왕의 조카다. 태종무열왕비 문희는 김유신의 여동생이었으며, 문무왕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가야인의 습성과 문화를 익히면서 자랐다.

문무왕은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개선하는 길에 국원경 욕돌역에서 하루를 묵게 됐다. 이때 태수는 잔치를 베풀면서 가야 소년 능안에게 검무를 추게 한다. 왕은 소년의 춤에 감동하여 가까이 불러 금잔에 술을 따라주며 치하했다. 어린 시절 추억의 가야무(伽耶舞)를 생각하고 감회가 벅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 삼국통일을 ‘가야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백제, 고구려 정벌과 대당(對唐) 결사투쟁으로 신라의 자주성을 지킨 주역들은 다름 아닌 가야의 후예들인 무사집단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빛을 찾지 못했던 가야사 복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우리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나라 가야, 잃어버린 역사 복원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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