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명재상을 꼽으라면 초나라 손숙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도 모든 관리들의 롤모델이자 귀감이 됐다. 왜 손숙오가 가장 존경받는 재상으로 평가됐을까. 
겸손과 검소함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그는 수리(水利)와 병법(兵法)에 유능해 왕에게 발탁됐다. 임금 다음가는 서열이었으면서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배려심이 컸으며 오만하거나 봉록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爲民)’는 생각뿐이었다. 초나라는 손숙오의 힘으로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으며 그를 발탁한 장왕은 춘추시대의 영웅으로 컸다. 중국의 모택동 주석은 지방을 순회하게 되면 공직자들에게 반드시 손숙오의 고사를 들려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왕이 재상을 고르는 일차 덕목은 청렴과 겸손이었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고국천왕 때 명재상으로 평가되는 을파소의 기록도 손숙오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왕은 처음 측근에게 정치를 맡겼으나 실패했다. 백성들이 실망하자 자신이 총명치 못했음을 자각했다. 왕은 어명을 내려 초야에 묻혀 지내는 어진 이들을 추천토록 했다. 그때 사람들이 안류(晏留)를 추천했다. 그러나 안류는 간곡하게 사양하며 을파소를 천거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나랏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나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왕은 안류의 건의를 듣고 정중하게 을파소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을파소마저도 관직을 거절한다.

“신은 미련하고 게을러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어진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시고, 큰일을 이루시옵소서.”

고국천왕은 삼고초려하여 결국 을파소를 재상에 임명할 수 있었다. 을파소는 겸손한 자세로 국정을 펴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을파소의 업적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기여한 진대법(賑貸法)이다. 그가 평민 시절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 같은 탁견이 나온 것이다. 왕은 을파소를 최고의 호칭인 ‘국상(國相)’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재상을 뽑는 데 삼망(三望) 제도가 있었다. 세 명을 추천받아 검증하고 나중에 임금이 낙점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오늘날 국회 청문회 인준 절차 과정처럼 추천 인물에 대한 시비가 대단했다. 인물의 됨됨은 물론 과거의 행적까지 들추어 조정이 시끄러웠다.

후보자 가운데 왕이 마음에 안 들면 추가 추천을 요청했는데 이를 ‘가망(加望)’이라고 했다. 왕이 점찍어 둔 신하가 빠졌을 때는 이런 절차를 선택했다. 인사를 하면서 명분과 정실이 작용해 통치자와 조야, 당과 당이 충돌한 것은 고금이 같다.

오늘날 국무총리의 덕목을 가늠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손숙오의 고사처럼 겸손하고 물욕이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고구려 을파소처럼 위민정신이 투철할 때 시대가 필요한 지혜로운 서정이 펼쳐진다.

우여곡절 끝에 새 총리가 임명됐다. 새 총리는 지금 이 시대 가장 긴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사심 없는 국정을 펴야 할 것이다. 청렴과 겸양을 실천하고 반대세력을 아우르며 그늘지고 소외된 곳을 찾아 고난을 해결하는 진정어린 모습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도 과거 정부의 전철을 밟지 말고 ‘인사가 만사’라는 섭리를 이행해야 한다. 인사 정도(正道)가 무너지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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