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유교사회에서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여 병을 얻는 것을 상효(傷孝)라 했다. 중종 다음 즉위한 인종(仁宗)은 지독한 효자였다. 그런데 중종이 별세하자 20여일간이나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 재위 8개월 만에 그만 승하하고 말았다.

중종실록을 보면 지독한 효자 얘기가 또 하나 기록돼 있다. 충북 영동에 사는 한 효자는 아버지가 임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입으로 빨아 병을 고치게 했다. 임금이 이 같은 사실을 듣고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치하하며 큰 상을 내렸다.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제일 효자는 아마 정조일 게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는 비극을 보고도 울지 못했던 아들은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정조는 아버지가 묻힌 수원 현릉원(顯陵園)을 자주 행행했다. 즉위 19년(AD 1795) 윤 2월 9일 이른 아침, 정조는 특별한 행차를 하게 된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 능을 간 것이다. 바로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 두 분이 회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정조의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를 보면 정말 장관이다.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갔으니 수행 인원만도 6천명이었다. 1백여명의 악대, 수백개의 깃발과 가마행렬은 무려 1㎞나 됐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부군의 묘소를 돌아보고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밖에 있었던 임금의 귀에까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니 얼굴빛마저 내색하지 않았던 슬픔이 왈칵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효자 임금은 그런 어머니의 상심을 걱정하여 따뜻한 차를 직접 올리는 예를 갖춘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에 송충이가 득실거려 소나무를 갉아먹자 분노했다. 내시를 시켜 모두 잡아오라고 명한 뒤 그 자리에서 산 채로 씹어 먹었다고 한다. 정조의 이런 효심 때문이었는지 현릉원에서 송충이가 사라졌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효행을 가르치기 위해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기도 했다.

은중경은 부모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기록한 불경전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했다.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 수미산(须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했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전남 강진 적소에서 18년간이나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집에 두고 온 두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항상 한탄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식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생각하는지를 걱정했다. 아들이 소년으로 성장하자 다음과 같은 당부 편지를 보낸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중략)…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몸소 불을 때 드리고, 그러한 일을 종들에게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고 기쁠 것이다. 어머니가 기뻐하시면 너희들도 즐겁지 않겠느냐? 두 아들이 효자가 되고 두 며느리가 효부가 된다면 나야 유배지에서 이대로 늙어죽는다 해도 아무 슬픔이 없겠다.”

충북 영동군은 예부터 효자가 많이 난 유명한 고장이다.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효 정문(旌門)을 가지고 있다. 마을마다 효자, 열녀문이 즐비하다. 박세복 영동군수는 최근 ‘효 민속원(孝民俗園, 가칭)’을 구상 중임을 밝혔다. 군이 구상하는 효 민속원은 옛 명인들의 사료관을 비롯, 전통음악 공연장, 효를 지속적으로 교육 체험하는 가족 수련관으로 짜여져 있다.

박 군수는 효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모친상 때 조위금 1억원을 고인의 뜻에 따라 장학기금으로 기탁한 바 있다. 날로 인륜이 퇴색되고 있는 오늘날, 단비와 같은 소식이어서 효 고사를 반추해 본 것이다. 오늘이 바로 어버이날 아닌가.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