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역사에서 중국 대륙은 우리와 어떤 관계였을까. 삼국유사는 2천년 전 한반도에서 고대국가를 형성한 지배자들을 고조선계라고 기록한다. 중국이 순수 혈통이라고 주장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멀다. 신라나 마한 등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이를 입증할 고조선계 청동기 유물이 쏟아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의 지배층은 만주 흑룡강 주변에 살았던 부여족이었다. 이들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랜 시기의 문화인인 홍산문화의 후손들이며 고조선 후예들이다. 고구려는 부여족과 예맥, 말갈의 연합 세력이었다. 이들은 2천년 전부터 한족들과 대립해 왔다.

주몽은 말갈을 통합하고 이들을 철기로 무장시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된다. 처음 5천명, 1만명이었던 고구려 기병은 광개토대왕 시에는 5만명으로 늘었다. 이들 대부대는 파죽지세로 만주대륙을 위시, 고비사막이 가까운 내몽고까지 정복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 신라 가야와 왜(倭)까지 굴복시켰다.

고구려는 한반도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한나라 세력을 축출했다.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설화는 한편의 로망이지만 대 한나라와의 전쟁에 왕자까지 참전했음을 알려준다.

백제는 6세기 들어서 자신들이 부여족의 후손임을 천명했다. 금강변 소부리로 왕도를 옮긴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선언했다. 중국 길림, 장춘 등 인근에는 백제라는 이름은 물론 조상으로 숭배한 ‘우태(優台)’ 이름을 딴 우태시(市)도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백제의 영토가 서해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바다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당시의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백제의 위세를 알려준다. 중국의 고대 사서들이 자신의 국가들과는 거리를 두고 기록했다.

중국 패자(霸者)들은 긴 역사 동안 한반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다. 한반도를 정복해야만 ‘완전한 중화(中華)’가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자국의 지배에 둔다는 것은 자기네가 임명한 관리가 그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 한반도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은 제후와 신하국의 위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자주독립을 인정한다.

당나라는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AD 675년 신라에 대한 공략을 준비했다. 한반도에 대한 완전한 정복이 당초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 야욕을 알아차린 신라의 용맹한 전사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당투쟁을 선언하고 당나라 군사들이 주둔한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당 세력 축출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의 실세였던 측천무후는 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화한 이근행 장군을 시켜 신라왕도 정벌을 명령한다. 이근행은 당, 말갈, 돌궐 등 20만명의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에서 내려와 한강을 육박해 왔다. 이때 신라는 전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와 일대 항전했다.

당나라 연합군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 매초성에서 신라군에게 처절할 만큼 패전했다. 이 전쟁에서 충격을 받은 당나라는 강경일변도에서 매우 우호적으로 전환, 신라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만다.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 요양으로 후퇴시켰다.

우리 한반도가 오늘의 단일민족으로 전통을 보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만일 매초성 전투에 패하고 신라문무왕이 당으로 압송됐다면 지금 한반도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조선이 ‘사대교린’을 국시로 내걸었지만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북방에 있던 흉노, 글안, 요, 금, 돌궐 등 큰 나라들이 속속 병합돼 나라를 잃었으나 한반도만큼은 달랐다. 수없는 침공에도 불구, 오뚝이처럼 일어나 나라와 역사 문화를 지켰던 것이다.

중국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말은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렇다면 ‘한족이 세운 명(明)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가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다’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국가지도자들은 과거 역사를 들추어 상대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행은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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