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이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충무공은 보성읍성 수군기지에서 선조에게 이 같은 장계를 올렸다. 역적으로 몰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충무공은 명량해전에서 13척의 배로 3백척이 넘는 왜 전단을 맞아 대승을 거둔다. 몇 년 전 상영됐던 영화 ‘명량’은 1700만이 넘는 관객들이 보고 감명을 받았다.

충무공의 놀라운 전술 뒤에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큰 힘이 있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며,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회자된다.

명량해전에서 조선 해군은 엄청난 규모의 왜 전선에 겁을 먹었다.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적선과 조우하자 도망자가 나왔다. 충무공은 부하장수들을 책망한다.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할 것이다.’ 이순신의 호령에 부하장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적장의 목까지 벴다.

이순신은 용장이라기보다는 덕장이었다. 한산도가(閑山島歌)에서 나타나듯 호각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군인이었다. 부인의 병이 위중하다는 기별을 듣고는 안절부절 했다.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는 ‘찢어지는 아픔’으로 통곡했다. 특히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었을 때는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면서 흐느꼈다.

충무공은 성격이 외유내강하면서도 담대했던 것 같다. 자신보다 세 살 위인 서애(西厓) 유성룡과는 어린 시절부터 한 동네에서 자랐다. 두 사람은 전쟁놀이를 자주했는데 우두머리는 항상 충무공이었다.

어느 날 어린이들이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고관행차가 지나가다 어린이들을 물러가라고 호통쳤다. 그러나 충무공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사령이 충무공을 꾸짖자 ‘우리는 지금 훈련 중입니다. 행차가 돌아서 가십시오’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서애가 충무공을 평생 친구로 여겨 임금에게 천거하고 목숨을 지켜준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인품과 충직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다.

난중일기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절절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장군은 전쟁터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난에 더욱 가슴아파했다. 적진 앞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전선에 실어 피난시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도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함의 빌미가 되고 선조가 미워했던 것인가. 충무공에게는 당장 왜 전선을 부수고 그들의 침략 야욕을 꺾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다.

노량싸움이 충무공 최후 전쟁이었다. 장군이 목숨을 생각했다면 퇴각하는 왜 전선을 그냥 놔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달랐다. 이들을 섬멸하여 다시는 조선을 침략할 수 없도록 응징하자는 것이었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은 흉탄을 맞고 쓰러진다. 생애 53년, 구국의 성웅은 이렇게 조국과 이별한다. 부하 군인들과 많은 백성들이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해군의 영웅 니미츠 제독은 “이순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이라고 평가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일본 영웅 도고 헤이하치 해군 사령관도 ‘나를 넬슨에게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충무공은 적국 일본에서까지 숭배되는 인물이다.

지난달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었다. 민족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나라 안보가 위태로운 시기 충무공의 살신보국 정신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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