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신라 경덕왕 대 신충(信忠) 고사는 요즈음 세태에 반추해 볼만하다. 그는 왕이 즉위하기 전 친구로서 함께 바둑을 두는 사이였다. 임금이 왕이 된 후 궁중에 불려갔으나 어느 날 홀연히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는 머리를 깎고 불자의 길을 걸었다.

왜 신충이 권력과 영화를 버리고 임금 곁을 떠났을까. 임금의 측근으로 오만해지거나 권력의 무상함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충은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으면서 친구인 경덕왕과 나라의 태평함을 비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진정한 임금 위함은 ‘신충’이라는 이름대로 역사에 남는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는 무학대사였다. 스님이 스스로 아는 게 없다고 ‘무학’이라고 자처한 것은 겸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조는 무슨 일만 있으면 무학을 찾아 자문을 받았다. 태조는 스님에게 승려 최고의 직위를 주고 국사(國師)로 삼는다. 이 자리에서도 무학은 왕에게 쓴소리를 했다.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뜻은 같습니다,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주소서.”

태조는 무학의 간청을 듣고 옥에 갇힌 많은 죄수들을 석방했다. 그리고는 스님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나 회암사도 서울과 가까운 거리이므로 곧 금강산 작은 암자로 숨었다.

아들 태종이 형제들을 도륙하자 태조는 함흥으로 돌아가 일체 누구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이 신하들을 보내면 모두 죽여 함흥차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런데 금강산에 있던 무학을 부른 것은 태종이다. 간곡히 아버지의 환궁을 도와달라고 애걸했다. 태조는 무학이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을 찾아오자 그만 마음을 열고 환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선 중엽 학자 조식(曺植)은 퇴계와 쌍벽을 이룬 학자였다. 젊은 시절 임금의 총애를 받아 학문을 토론한 사이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지리산에 은거했다.

명종이 즉위하여 조식을 지리산에서 가까운 단성현감을 제수했으나 그는 상소로 응답했다. 비록 서울을 떠났지만 임금과 나라가 잘 되도록 쓴소리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됐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명종이 모욕감을 느껴 처벌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실학자 이익(李瀷)은 조식을 높이 평가한다. ‘조식이야말로 조선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칭송했다.

평생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선비로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캠프에서 대통령 만들기에 큰 역할을 한 몇몇 측근 인사들이 정치판을 떠난 얘기는 신선하다. 이들의 초연한 행동이 신라 신충의 겸양과 비교된다. 그런데 대통령 곁을 떠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좋은 대통령이 되도록 무학이나 조식처럼 진정 어린 고언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을 만드는 데 앞장서 온 촛불세력 가운데 일부단체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찰 안 되면 다시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겠다는 것이다.

촛불의 의미도 퇴색될 뿐 아니라 이런 행동을 지지할 국민들은 별로 없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엇갈린 명암이라 고사를 반추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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