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조선시대 ‘기별(寄別)’은 요즈음 소식지와 같은 유형의 매체였다. 선조 때 유명시인 최경창(崔慶昌)과 기생 홍랑의 러브스토리는 기별로 끈끈해진다. 최가 경성(境城)에서 관리로 있을 때 알았던 홍랑은 그의 문학을 깊이 사랑했다. 최가 다시 서울로 갔을 때 홍랑은 그가 보내준 기별로 애틋한 사랑을 키웠다.

홍랑은 임진전쟁 때는 낭군의 시고(詩稿)를 안고 피난을 가 온전하게 지켰다. 홍랑은 전쟁이 끝난 후 기별을 받고 서울로 달려가 꿈에 그리던 낭군을 만났다. 사후에는 유족들이 홍랑의 정절을 기려 그녀의 시신을 최의 곁에 묻었다고 한다.

기별이 생긴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조선 초기에는 ‘기별지(寄別紙)’라고 불렸으며 세조 때부터 ‘조보(朝報)’로 개칭, 승정원에서 취급했다. 이 조보에는 국왕이 내리는 어명과 각종 상소문, 관리의 임면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일반이 기별을 발행하려면 사헌부 허가를 얻어야 했다. 조보는 서울 각 관서와 4대문 안의 상류계급뿐 아니라 전국 지방관서까지 보내졌다고 한다.

중종 연간에는 서울의 육전 거리에 있던 상인들에게도 배포됐다. 선조 시기에는 왕비인 인목대비의 공주 출산을 담은 호외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선조는 조보를 보고 진노했다. “이것이 이웃 나라에 흘러나가면 나라의 기밀을 알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 처벌했다.

한동안 중앙에서 사라지긴 했지만 일반에서의 조보나 기별은 없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조 때 어린 세손을 눈물로 지켰던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기별’이란 문구가 등장한다.

- …세손 위한 고심으로 여러 번 ‘기별’하였으나, 선친께서는 시종 듣지 않으시니 정처가 나를 격동하되, 영상께서 나라를 위하셔야 하는데 왜 옳은 일을 안 하시는지 모르겠나이다…(하략) -
조선시대 후기에는 암행어사가 내려온다는 가짜 기별이나 허위 조보가 나돌았다. 상대 당이나 정적을 비난하며 반역을 선동하는 ‘벽서(壁書)’가 등장하기도 했다. 조정은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여 이런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영조 때 나주벽서사건(乙亥獄事)이 가장 컸다. 주동자는 노론과의 정권다툼에서 진 소론의 윤지(尹志)였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에 불만을 품고 소외층을 선동해 임금을 비방하는 악의에 찬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다. 이 사건으로 윤지는 서울로 압송돼 영조의 직접 신문을 받았으며 역적죄로 참수 당하고 말았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짜 뉴스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가짜 기별이나 민심선동의 벽서 같은 허위 뉴스도 범람하고 있다. 신문방송윤리강령을 외면한 이들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에 대한 가짜 뉴스 양산은 대표적이다. 많은 언론들이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려 모두 죽는 것처럼 오도했다. 최근에는 세월호 침몰에 따른 원인을 미국이나 한국 잠수함 충돌설로 몬 보도도 허위로 판명됐다. 인양돼 물 위로 떠오른 세월호는 충돌 흔적이 없었으며 전문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억측과 찌라시 뉴스들이 결국 허위로 판명되고 있다.

광우병 시위 현장에서 선동했던 정치인들이 다시 대선현장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가짜 뉴스를 다루어 왔던 해당 언론들은 사과 한마디 없다. 아님 말고 식이다. ‘역사는 사실만을 기록해야 한다’는 ‘춘추필법(春秋筆法)’ 정신이 언론과 언론인들의 가슴속에서 살아나야 한다. 이런 진솔된 언론만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사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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