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바쁜 일상에서 큰마음을 먹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지역을 다니며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 날 32년만의 폭설로 인해 나의 발은 제주에 묶여 버렸다. 그리고 만나게 된 여성독립운동가 유족. 나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어머니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던 유족의 눈빛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어머니는 나에게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남겨 주셨어요. 제가 지금 어린이집을 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했던 고수선 여사의 아들 김률근 선생. 어린이들을 인간답게 키우는 일이 곧 나라사랑의 길이라고 한 어머니의 말씀을 받들어 일생을 어린이집 운영에 쏟고 있는 그를 만나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고수선 여사(1898~1989)는 제주 대정읍 가파도에서 부친 고석조와 모친 오영원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그는 4㎞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며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했다. 이후 신성여학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의학전문학교를 수학했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인 여의사가 되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활약하며 국내의 군자금을 송금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면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일본의 감시는 끝이 없었다.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중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국내에 귀국했지만 3.1만세시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손가락 불구가 될 정도로 고문을 받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여성의 몸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시대상과 사회적 제약을 감내해야 했지만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은 강했다. 왜냐하면 광복이야 말로 민족 희망의 빛이요 후대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수선 여사의 활동은 광복 이후에 더 확연히 드러난다.

6.25 전쟁의 고아들을 구휼하는 일환으로 홍익보육원, 제주 모자원, 송죽학원, 선덕어린이집, 경로당 등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여권신장에 앞장섰다. 1952년에는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으로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던 그녀는 이후 한국부인회 제주지회 창립과 지역여성단체의 설립 등 선구적인 여성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고수선 여사의 활동이 주목되는 것은 ‘선도적인 여성지도자’라는 수식어를 뛰어넘어 ‘위대한 어머니’였다는 점이다. 자녀의 가슴에 조국애와 세상을 보는 사랑의 눈을 확연히 심어준 그녀의 흔적을 대하면서 이들을 찾아가는 나의 길이 상실된 역사의 흔적을 회복하는 작은 발자욱이 되길 소망해 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