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3시간을 훌쩍 넘기고 도착한 전주는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듬뿍 품고 있었다. 요즘은 인터넷이 빠른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지만, 오랜 역사의 흔적을 찾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발품이 제 몫을 한다. 특히 시대흐름과 인물, 사건의 연계성을 찾기 위하여 관련한 이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한 뒤, 생각의 동력을 충분히 가동해야 조각처럼 흩어진 역사의 조각을 맞출 수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 과정이 바로 그런 현장소통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분야다.
간간히 보이는 한옥자락을 눈에 담으며 일행이 찾은 곳은 근대시기 시대와 신앙이 소통했던 ‘전주서문교회 100주년 기념박물관’이었다. 올해로 122주년을 앞두고 있는 박물관은 한국을 향한 순교자의 사랑이 고스란히 묻혀있었다.
국가와 지역을 넘나들었던 이들의 행적은 이젠 빛바랜 비석만이 그 행적을 확인시켜준다. 이방인의 나라에 잠들어 있는 이들이 전통과 철저했던 관습의 벽을 허물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타인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었다.
전주 예수병원 의학박물관 뒷동산의 선교사 묘역에는 선교사 가족비석과 묘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가족비석에는 전위령(선교사 전킨), 메리 레이먼(부인)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이들이 일생동안 한국에 몸담았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담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전주지역 항일투쟁의 주역을 양산했던 교육기관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당시 선교사의 활동은 선교, 교육, 의료가 주요활동으로 서로 연결고리 역할을 이루며 확장시켜나갔다. 전주에 본격적인 학교교육을 보급했던 이도 선교사였다.
전주에 최초로 공립소학교가 설치된 것은 1897년, 이어 1900년 미국 남장로 선교부가 교육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전여학교는 탄생한다. 기전여학교(記全女學校)의 교명은 1대 교장인 전킨 목사(Junkin memrial, 한국명: 전위령)의 사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전(記全)으로 명명되었으며, 전주의 벼리(으뜸)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현재까지 설립년도가 1902년으로 알려졌으나 근래에 선교사 편지에서 1900년으로 재확인되었고, 전라도일대의 첫 개교여학교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설립은 여 선교사 미스테이트(Miss Mattie Tate)와 1대 전킨 교장이 주도했다.
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선교의 길로, 여학생들을 개화의 대열에 들어서게 했던 이들의 시작은 기와집 한 채와 교과서, 그리고 부족함 없는 사랑이었다. 정식인가도 없이 기독학교로 시작했던 기전여학교였지만, 1909년에 이르러 고등과 설치인가를 받아 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한다. 한일병합이후 기전여학교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민족교육기관으로 여성의 주체성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장으로 일대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다.
특히 송죽회 비밀단체에서 활약했던 박현숙 선생은 ‘공주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구국운동을 고취시켰다. 그 영향으로 임영신, 오자현, 송귀내, 유채봉, 오순애 등 기전여학생은 비밀결사대로 활약하며 전주 3.1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던 여학생의 손에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던 날, 그 날은 기전여학교(전킨을 기념한 교명)에 묻혀 있었던 전킨 목사의 자유, 평등, 사랑, 박애 정신이 태극기에 담겨 힘차게 날아올랐다. 이렇게 역사는 한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담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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