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우리는 그녀를 ‘여자 안중근’이라 부른다. 한일병합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간도 일 대와 러시아, 중국 등 국경과 인접한 지역부터 먼 지역까지 수많 은 이들이 오직 ‘독립’을 향해 모였다. 1922년 3월. 그런 독립운동 가들이 모여 언쟁을 높였다. 독립운동이 장기화될수록 부족한 군 자금과 열악한 환경, 일본 경찰에 쫓기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들 의 마음은 피폐해져만 갔다.

‘조국독립’만을 염원이었건만 희망의 빛은 점차 퇴색되어 갔고, 각 단체의 의견대립은 극화되면서 높은 언성이 오갔다. 단합이 아 닌 분열이다. 그때, 한 여성이 이들을 주목시켰다. 엄지 한 마디를 잘라 써내려간 혈서를 들고 많은 이들 앞에서 읽어 내려간 여성. 바래져가는 독립정신을 재차 확인시켰던 여성, 그녀가 바로 남자 현(1872~1933년)이다.

“왜 타국에 와서 민족끼리 싸우고 있는가?” 남자현은 피가 흘러 내리는 손을 들고 대립의 장을 펼치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단합을 호소했다.

1920년 이후 일제의 탄압은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압록강 과 두만강 일대에 병력을 추가 배치했고 독립단체나 독립운동가 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오직 독립군 토벌에 혈안이 되어 있었 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일어난 ‘경신참변’에서 일본군 2만여명이 동원된 가운데 서북간도 지역의 한인 3600여명을 살해하고 3200여 채의 가옥과 학교, 교회를 불태웠다.

그런 일제의 잔악함이 도를 넘어서면서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모였건만 이들은 또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손마디를 잘라 혈 서로 호소했던 남자현.

당시의 일화는 1948년에 발간된 잡지 ‘부흥’에 “선생은 이 일을 크게 근심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한 주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손 가락을 베어 그 피로 글을 써서 책임관계자들을 소집했다. 그 성의 와 순국 정신에 감격한 독립운동 간부들은 누구나 뜨거운 눈물과 죽음을 각오하는 피의 설유에 각각 잘못을 회개하고 완전한 쌍방 간의 화합이 성립되었다…”라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19세에 혼인한 뒤 의병 활동 중 전사한 남편의 뜻을 받들어 구국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그녀의 삶은 처절하리만큼 힘든 길을 가 고 있었다. 단지혈사사건 이후에도 1932년 9월 19일 국제연맹조사 단의 방문일자에 맞추어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르고 피로써 써 내려간 ‘대한독립원(大韓獨立願)’, 그 다섯 글자에 민족독립의 염 원을 담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던 그녀.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여성이라는 미명 하에 뒤에 서지 않았고 시대와 타협하 지 않았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여성 독립운동가. 그들의 모습은 조국독립의 염원 과 후대에 독립된 나라를 계승하고자 했던 어 머니의 마음이 교차되어 있다. 그들처럼 과연 “이 시대의 여성들은 나라를 염려하고 시대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고자 역사의 무게를 견 뎌내고 있는가?”라고 물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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