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영웅’의 사전적 해석은 이렇다. ‘사회의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서 대중을 이끌었던 사람,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정리되어 있다. ‘보통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룬 사람’.

그들은 일반인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웅’이라는 칭호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투철하고 강인한 의지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투쟁하고 도전한 활약상이 담겨있다. 특히 역사 속 영웅의 활약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존재감이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처음부터 영웅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흐트러짐 없는 강인한 의지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 곁에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제강점기 목숨을 바쳐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이들에게 스승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스승, 김하란사 여사도 마찬가지이다.

김하란사(1875~1919)는 한국여성 최초로 문학사를 취득한 지식인이다. 부친 김병훈(金炳薰)과 모친 이씨 부인 사이에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고 인천 감리였던 하상기(河相騏)와 혼인했다. 선진문물을 일찍 접하면서 발동된 배움의 강한 의지는 1896년부터 4년간 이화학당 수학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가 이화학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낸시(Nancy), 한자로는 란사(蘭史)로 음역하여 불리웠다. 이후 해외유학을 하면서 그녀의 이름은 남편의 성을 따른 하란사(河蘭史)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여성독립운동가 김하란사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일본 동경의 경응의숙, 게이오대학에 이어 미국의 웨슬리안 대학에서 수학했고, 1906년 한국여성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여성지식인의 싹을 틔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초 여의사인 박에스더와 함께 여성지식인의 선두에서 여성 교육은 물론 국내외 독립활동으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해외유학의 결실을 학위취득으로 이은 여성, 외국 선교사들과 능통한 외국어로 주목받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관심은 늘 이화학당에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교육의 물꼬를 틔웠던 교육기관 이화학당이 바로 미래 한국여성지식인을 키우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들이 3.1만세운동에서 확연하게 두각을 나타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공주 영명학교에 이어 이화학당에서 수학했던 유관순 열사에게 이화학당의 총교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김하란사는 여성지식인이라는 상징성과 대표적인 선지자였다.

또한 일제강점 하에서 여성의 자존감을 일으켜 세웠던 여성의 존재감과 그 영향은 컸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 수많은 여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마음껏 소리쳐 만세를 부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영웅의 뒤에 서 있었던 수많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 김하란사를 통해서 영웅과 함께했던 수많은 스승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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