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12월 3일, 국민들은 TV로 긴급경제구제자금 합의서에 서명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상실감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경험했던 대한민국. 국내에는 기업부도사태, 대량해고, 원화가치폭락, 구조조정 등으로 실업자 수는 170만 명에 육박했고, 국민들은 그 위험과 부담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그 와중에 국가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금모으기 운동’으로 발휘되면서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했던가. 금모으기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가 합치되어 어떤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가를 보여준 사례였다.

필자는 전국의 여성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소수, 개인의 힘이 곧 민족의 저력이자 위기를 극복한 동력의 씨앗임을 확인하고 있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의 발의로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의 나라 살리기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강제 차관된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좌초할 위기에 처하기 때문에 절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각계각층에서도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와 의미를 지원. 격려하는 것은 물론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했고, 신문사는 논설과 기사를 연일보도하며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전국으로 확산된다.

그 과정에서 한국여성의 행보도 두드러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연일 보도되는 기사에도 여성의 자발적인 변화가 포착된다. 부녀자가 중심이 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을 중심으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2월 23일에 조직되며 시작된다. 이어 서울,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평안, 함경, 황해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국채보상운동은 양반여성은 물론 신여성, 장터에 생활터전을 둔 여성, 기독교 단체여성, 의기 있는 기생, 일반 농상인 등 신분과 연령을 초월한 의기투합되어 국채보상의연금이 마련되었다. 현금의연형(현금), 패물의연형(패물), 절미감찬형(쌀, 곡물) 등 쌀 한술부터 급수비, 방문모금, 금은 패물 등에 이르기까지 작은 것부터 여성은 시작했다.

이처럼 국가위기를 극복하는 동력은 바로 국민의지에 있다. 여성국채보상운동은 자발적인 행보와 나라사랑실천에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자 위기에 대처하는 한국여성의 지혜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대를 통찰하는 눈이 마음으로, 마음이 실천으로 전달되어 발휘된 나라사랑정신은 하나의 역사로 기록되어있다. 국채보상운동! 그것은 전 국민의 가슴울림이 거대한 파도로 일어난 역사의 한 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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