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짚풀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1998년 4월 안동 정상동 택지 조성을 위해 분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중후기에 살았던 고성이씨 이응태(1556~1586)가 염습 당시 모습 그대로 출토됐다.

그의 시신 위엔 부인인 원이 엄마의 편지와 함께 머리맡에 한지로 싸여 있던 짚신 한 켤레가 발견됐다. 병들어 누워있던 남편의 쾌유를 빌며 부인이 머리카락을 잘라 삼 껍질과 함께 신으로 삼은 것이다.

옛말에 보은의 뜻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아 드린다”는 표현이 있다. 바로 그 실체가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짚신이다.

우리 역사 속 짚신은 단순히 신발의 의미를 벗어나 관념적 요소가 깊이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세시풍속으로 사람이 죽으면 대문밖에 짚신과 동전, 밥을 놓는다. 이는 저승사자 또는 망자(亡者)가 짚신을 신고 배불리 밥을 먹고 노자를 가지고 저승으로 편히 가라는 뜻이다.

예전엔 액막이의 한 행위로 서낭당 앞을 지나며 짚신 한 짝을 벗어던지고 침을 세 번 뱉었다. 짚신을 던짐으로 액운이 그 신을 신고 멀리간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또 전염병을 막기 위한 예방법으로 병이 돌면 대문 문설주에 짚신한 짝을 걸어놓기도 했다.

이러한 풍습은 곡물에 깃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곡령(穀靈) 사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짚신이 온갖 부정과 악귀를 막기도 하고 쫓기도한다고 여긴 것에서 비롯됐다. 우리민족이 영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한 예다.

이렇듯 수천 년의 역사 속에 함께하면서 우리 민족의 액막이 역할을 담당했던 짚신의 맥이 이어져 영원한 한반도역사의 액막이 역할을 감당하길 기원해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