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등굣길에 8살 여자아이를 교회 화장실로 끌고가 성폭행해 성기와 항문의 기능을 영구 상실케 한 인면수심의 범죄자에게 12년이라는 형을 선고한 것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만취 상태에서 저지른 점을 감안해 12년을 선고했지만 국민들은 법정최고형까지 형량을 높여야 한다며 법원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급기야 한 포털에서는 청원운동을 벌이며 법정최고형은 물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피해보상까지 해야 한다며 격앙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의 이번 확정 판결로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개신교의 성장과 종교편향 1970년대 경제 성장기는 개신교의 양적 성장기이기도 하다. 급속히 근대화되던 시기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마음 둘 곳 없던 70년대 노동자들 상당수가 상대적으로 문명적 이미지를 지닌 기독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한국개신교 대형화의 기초가 닦였고, 주류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2년에는 개신교인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청와대에서 예배를 보는 일도 생겼다. 청와대라는 공적 장소에서 개인적 종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사회문제가 될 정도의
‘사회 화합과 종교 간 상생’이란 시대적 요구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일부 종교계의 시대착오적 발상이 사회와 종교계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기독교의 성시화 운동을 후원하고 있다는 광고가 게재돼 논란이 일고 있다”는 등의 기사가 요즘 각 종교 및 일반 언론의 주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겉으론 화합과 상생을 외치지만 사실은 공권력까지 동원, 사회와 국가를 기독교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소위 ‘성시화 운동’이 그 주범이다. 이 운동은 종교의 자유, 공직자 종교편향금지를 위한 개정 법령이란 국법을 완전 모독
지난 10일은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71년째 되던 날이었다. 당시 일제의 압력에 못 이겨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인 장로교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일본의 태양신을 섬기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이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라는 죄를 범한 사건이기도 했지만 일제 앞에 신앙인 모두가 굴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쳐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핑계
3. 갈등의 원인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1884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쇄국과 쇄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급기야 1910년 일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나라를 잃는 엄청난 경험을 하다 보니, 그동안 나라를 지탱해오던 전통적인 것에는 더 이상 기대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고 또 추구했다. 당시 상당수 한국인에게 새로운 것은 대체로 서양문명, 특히 미국 문명이었다. 미국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면 미국처럼 부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하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종교처럼 미묘한 관계도 흔치 않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헌법에 따라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헌법 20조에는 “①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②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정교분리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까이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내각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급에 대한 인선과정에서 특정종교와 특정교회 편중 시비가 불거졌던 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출신을 의미하는 이른바 ‘고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