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국민회(國民會) 회원들은 도산의 지도를 잘 받았으며, 이런 결과로 거주지는 깨끗하여졌으며 신용도(信用度)는 높아질 수 있었다.

이렇게 신용도가 올라가자 사업주들은 국민회가 공급하는 노동자를 신임하였으며, 관리들도 국민회를 신임하게 되어서 한국인들에게 전할 국가의 의사는 국민회를 통하여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여행권이 미비하거나 휴대금이 부족한 한국인도 국민회의 보증이 있으면 미국에 입국할 수 있었으니 당시 국민회는 사실상 대사관(大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1913년 도산은 흥사단(興士團)을 세웠는데 이는 1908(융희 2)년 국내에서 조직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정신을 계승한 것인데, 본래 흥사단은 유길준(兪吉濬)이 조직한 흥사단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이름이 좋기 때문에 흥사단이란 명칭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1912년 도산은 리버사이드로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와서 송종익(宋鍾翊)을 찾아 흥사단 약법(興士團約法)을 보였는데 송종익은 이리하여 흥사단의 첫 동지(同志)가 되었다.

도산은 송종익에 이어서 다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하여 정원도, 하상옥, 강영소의 세 사람을 얻어 발기인을 삼았고 다시 한 사람씩 동지를 구하여 마침내 흥사단은 1913년 12월 20일 홍언(경기도), 염만석(강원도), 민찬호(황해도), 송종익(경상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으로 창립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창립위원장은 홍언이 맡았다.

흥사단이 창립된 지 5년 후가 되는 1918년 도산은 멕시코에 산재하여 있는 한인 동포들의 거주지를 8개월 동안 직접 방문하여 연설과 직접 지도를 통하여 국민회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또한 원동 지회(遠東支會)는 이강(李剛)의 손으로 처음에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에 두었으나 거기에는 권업회(勸業會)가 있는 관계로 국민회에서 분리되어 본부는 치타로 이전하였다.

이와 관련해 시베리아 각지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그 지방마다 국민회를 조직하여 1년에 한 번씩 치타에서 대의원회를 열고 또 기관지로 ‘정교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여기서도 국민회는 러시아 관리의 신임을 얻어서 한국 국민이라는 여행권을 사용하였으나 1914년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려서 불가피하게 활동을 중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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