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09(융희 3)년 10월 26일 발생한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의 배후로 도산(島山)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체포되어 1개월 반 동안 취조를 받았으나 안중근과 공모하였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여 12월에 전부 석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統監)이 최석하(崔錫夏)를 통하여 도산을 비롯하여 국내 유명지사들로 구성된 내각 수립을 제안하였다.

이와 관련해 최석하는 평북 곽산 출신으로서 1902(광무 6)년 21세에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의 전신(前身)인 법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일본 외무성에 건백서를 제출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하기를 자원하여 학생 출신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어에 유창하고 이토 히로부미 통감 때에 일본과 교섭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데라우치가 최석하에게 내각수립 제안을 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이러한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제로부터 이용당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산이 데라우치의 제안에 거절의 의사를 표시한 이후 신민회(新民會)는 간부회의를 열고 장시간 토론한 끝에 국내외로 병행하여 투쟁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전쟁전략을 최고 전략으로 채택한다.

둘째. 국외에 독립군 기지와 그 핵심체로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셋째.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던 간부들은 원칙적으로 국외에 망명하여 이 사업을 담당하기로 한다.

넷째. 국내에 남은 간부들과 회원들은 이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종래의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신민회의 이러한 결정으로 서울에 전덕기(全德基)를 비롯하여 황해도에 김구(金九), 평남에 안태국(安泰國), 평북에 이승훈(李昇薰) 등이 국내 운동을 담당하고 베이징(北京)에는 조성환(曺成煥), 신채호(申采浩)가 활동하고 서간도에는 최석하(崔錫夏),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북간도에는 이동휘(李東輝), 연해주에는 이동녕(李東寧), 미국에는 도산(島山)이 망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산은 거국가(去國歌)라는 슬픈 노래를 남기고 마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장연에 이르렀으며, 거기에서 청인(淸人)의 소금배를 타고 청도로 향하였고, 다른 동지들도 변장하여 국경을 탈출하여 청도에서 상봉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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