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5)
[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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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島山)이 귀국한 이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을 중심한 인사들과 뜻을 모아 1907(융희 1)년 4월 20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것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 기존의 합법적인 학회와 단체가 다하지 못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도산이 귀국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신민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미 소개한 상동청년학원과 같은 비밀결사(秘密結社)의 성격을 띤 단체가 국내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신속하게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민회가 조직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상동청년학원은 어떤 단체인지 소개한다.

상동청년학원의 설립과 관련해 본래 상동교회 내에는 엡윗청년회가 있었는데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본 단체의 회원들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운동(上疏運動)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크랜톤 목사가 이러한 운동이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엡윗청년회를 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스크랜톤 후임으로 부임한 전덕기(全德基) 목사(牧師)가 스크랜톤 목사에 의하여 해산된 엡윗청년회의 이름을 상동청년학원으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동청년학원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설립된 정치적 성향이 강한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도산의 귀국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신민회의 창립 발기인은 도산을 비롯하여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류동열(柳東說), 이동휘(李東輝), 전덕기(全德基) 등이라 할 수 있는데 도산을 제외하고 당시 상동교회 교인이거나 상동청년학원과 연관을 맺고 있던 인사들이라는 것인데 특히 전덕기는 상동교회를 시무(視務)하는 목사였으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신민회에서 상동파(尙洞派)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그 목적은 첫째. 국민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과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할 것, 둘째. 동지(同志)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國民運動) 역량을 축적할 것, 셋째. 교육기관(敎育機關)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靑少年敎育)을 진흥할 것, 넷째. 각종 상공업 기관(商工業機關)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富力)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한편 신민회의 중앙조직(中央組織)은 초창기에는 4명이 핵심을 이루었는데 중앙총책(中央總責)에 양기탁(梁起鐸)을 비롯하여 총서기(總書記)에 이동녕(李東寧), 재무(財務)에 전덕기(全德基), 집행원(執行員)은 도산(島山)이 맡았다.

또한 의결기관(議決機關)으로는 의사원(議事院)을 두어 각 도의 총감(摠監)을 임명하고 도감 밑에 군감(軍監)을 두었으나 도감이나 군감은 수직적으로 알 수 있어도 군감끼리 서로 알 수 없게 조직되었다.

예를 들어서 황해도의 도감과 그 도내의 군감은 서로 알 수 있어도 같은 도내의 군감끼리는 알 수 없게 조직되어 서로 만나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한 지방의 조직이 발각되어도 일망타진(一網打盡)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며, 특히 엄선된 회원들이 확고부동한 신념과 정열로 뭉친 독립운동(獨立運動) 단체였기 때문에 1911년 데라우찌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일제 경찰의 정보망에 적발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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