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신민회(新民會)는 조직이 결성된 이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국권회복(國權回復)의 방법으로 특히 주력한 것은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이었다.

신민회가 중점을 두고 설립한 교육기관은 중학교였는데 이는 중학교 내에 사범교육과정을 설치하여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신민회가 설립한 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필요한 신교육을 실시하여 전국적으로 파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는 정주의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신천의 신흥학교, 안악의 양산학교, 서울의 협성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신민회는 이러한 교육운동 이외에 계몽강연과 학회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안악군면학회를 비롯하여 해서교육총회, 평양청년권장회, 서북학회 등 각종 학회의 강연회, 토론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강연을 통하여 민중들에게 애국주의(愛國主義), 국권회복(國權回復), 민권사상(民權思想)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한편 신민회의 산하단체로 1909(융희 3)년 8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조직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청년학생들을 상대로 민족정신(民族精神)을 고취하고 구국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정신과 소질을 길러 주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이와 관련해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發起人)은 윤치호(尹致昊)를 비롯하여 최남선(崔南善), 장응진(張膺震), 최광옥(崔光玉), 차리석(車利錫), 안태국(安泰國), 채필근(蔡弼近), 이승훈(李昇薰), 이동녕(李東寧), 김도희(金道熙), 박중화(朴重華), 전덕기(全德基) 등이었는데 여기서 도산(島山)은 제외되었으나 청년학우회가 조직되는 데 있어서 도산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서울분회를 비롯하여 개성, 안악, 평양, 선천, 곽산, 용촌, 의주 등에 분화를 두고 확대되었으며, 중앙위원장에 윤치호를 비롯하여 중앙 총무에는 최남선이 임명되었으나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해산되었다.

청년학우회가 조직된 이후 2개월이 지난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일제는 이 사건의 배후에 국내에 비밀조직이 존재할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도산을 비롯하여 이갑(李甲), 류동열(柳東說), 이동휘(李東輝), 노백린(盧伯麟) 등 여러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를 체포하였는데 평양 대성학교애서 체포되었던 도산은 사건의 심각성을 예감하고 체포되기 전날에 숙소에 있던 신민회 관련 문서를 소각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산의 이러한 신속한 행동으로 다른 동지(同志)들에 대한 일제 검거는 없었으며, 일제는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신민회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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