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12)
[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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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상해임정(上海臨政)이 수립된 이후 신민회(新民會) 시절부터 뛰어난 조직력과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며, 미국에서 교포들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도산(島山)의 등장은 상해 동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도산은 상해에 도착한 이후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홍십자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윤현진(尹顯振)과 신익희(申翼熙)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이 도산을 문병하여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공석 중인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자신은 상해에 온 목적이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기 위하여 왔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임정 인사들의 제안에 도산은 20여 일 동안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그런 가운데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을 상해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도산은 신민회의 경우에서와 같이 독립을 위하여 민족 단일 진영을 주장하였으며, 신민회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경우에서와 같이 다른 인사를 핵심 인물로 추대하고 정작 자신은 무명의 인물로 일관하였던 것은 자신으로 인하여 단합이 되지 않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정 인사들은 도산의 출마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는데 도산은 그러한 제안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첫째.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것이요, 둘째. 그들이 상해로 모이면 국무총리 대리를 도산 대신 다른 인사를 임명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장파 인사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도산은 결국 그 의견을 수용하여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 내무총장으로 취임한 도산은 각지에 있는 거두(巨頭)들을 상해로 모이게 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3년간 꾸준히 해외 운동의 조직화와 대동단결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눌 수가 있으니 첫째. 해외 각지에서 흩어진 수령 급을 한데 독립운동의 중심체를 만들고자 한 것이 시기적으론 1919~1921년이라 할 수 있으니 독립협회와 신민회의 전통을 다시 살려 보려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국민 대표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핵심 세력을 구성하려고 노력한 시기로서 구체적으로 1921~1923년이라 할 수 있으니 도산의 이상적 민주방식의 시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상해 중심의 정부 형태를 단념한 이후 만주의 군사단체 및 민간조직을 통합하고 이상촌을 건설하여 장구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려고 노력한 시기로서 1924~1931년에 해당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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