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11년 미국 뉴욕에 도착한 이갑(李甲)을 이민국 관리가 환영하는 의미에서 악수를 하려 하였으나 그가 손을 잡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상륙불가라는 조치를 취하였으니 청천벽력(靑天霹靂)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갑은 러시아에서 미국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의 여독(旅毒)이 풀릴 겨를도 없이 다시 유럽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독일 함부르크에 내려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대학 부속 병원장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병원장은 이갑에게 특별히 치료할 방법은 없으나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에 힘쓰면 2,3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말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갑은 다시 러시아로 갔는데 그로부터 6년 후인 1917년 향년(享年) 41세를 일기(一期)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한편 도산은 이갑이 뉴욕에 상륙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며, 부인과 의논하여 이갑의 치료비로 1,000불을 보냈으니 동지(同志)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숙연한 심정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 도산(島山)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大韓人國民會總會長)의 중책을 맡게 되었는데 도산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동포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저축을 장려하여 회원 각자가 독립하여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하며, 또한 거류국 관민의 신뢰를 얻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함으로써 일본이 한인들을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도산은 기존에 의연금(義捐金)이란 명목으로 수시로 무제한으로 징수하였던 것을 과감히 개선하는 조치를 취하여 1년에 5불만을 정기적으로 징수함으로써 회원들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주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무감의 수입으로 도산은 1년 동안의 예산 목표를 수립하였는데 원칙적으로 예산을 지출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하였다.

아울러 생활개선과 관련해 도산이 처음에 미국에 입국하였을 때와 같이 거처의 청결을 강조하였으며, 미국인보다 더 깨끗하게 생활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예의를 지키면서 살 것도 장려하였는데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미국인과 거래하는 데 있어서 경우를 분명히 하고 더불어 한번 약속한 것이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신용을 지킬 것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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