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은 1920년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조직된 이후 만주나 북경 근처에 이상촌(理想村)을 만들어 임시정부(臨時政府)나 흥사단 본부(興士團本部)의 근거지를 세워서 생활난에 빠진 동포도 구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면서 국민개병과 국민개납을 통해 독립전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또한 상해에서 항일 역량의 통일단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침식을 잊고 동지들을 만나 설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틈나는 대로 근거지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만약 그런 기지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해외 동포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는 공화국이자 이상촌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근거지를 이상촌으로 불렀던 것은 일제나 중국 관헌의 견제와 감시를 피하고 장기적인 생활기반을 만들어 가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명칭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은 1921년과 1922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에 몰두하던 시점에서도 흥사단의 근거지도 겸하고 재정도 조달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다녔다.

1922년 천세헌(千世憲)과 함께 직예, 산동, 안휘, 강소 등 중국 각지를 탐사하여 근거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지리적 조건이나 중국 내부 사정 등이 겹쳐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산은 모범촌 건설의 후보지로 내몽골 지역까지도 주목했으며, 한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진 곳은 내몽골의 포두진이였다.

이곳에는 1923년 평북 출신의 신우현(申禹鉉) 외 4명의 한인이 3,000원의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해 수백 명의 한인을 이주케 할 계획이었으며, 1926년 이들은 배달농장을 세우고 포두성 내에 배달학교를 세워 운영하였다.

한편 도산은 1927년 류기석(柳基石)과 함께 만주 지역 동경성과 경박호 연안을 답사하며 지세와 풍토, 수리관계 등을 조사하였다.

이어서 도산은 1928년에 양자강 연안의 진강 부근의 중국인 토지를 빌려 한인들을 이주시킬 계획을 하였으며, 다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금 문제 때문에 중국에서는 더 이상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 다음 지역으로 생각한 곳이 바로 필리핀이었는데 도산은 1929년 2월 9일 필리핀 한인들의 초청으로 김창세(金昌世)와 함께 2개월간 돌아보고 3월 30일에 상해로 다시 돌아 왔으며, 결국 이상촌 건설 계획은 실현하지 못하였는데 자금 문제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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