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島山)이 중국으로 망명한 해에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면서 1897(광무 1)년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이후 불과 13년 만에 국권(國權)을 잃게 되었다.

한편 도산을 비롯하여 이갑(李甲), 류동열(柳東說), 신채호(申采浩),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이종만(李種萬), 김지간(金志侃), 조성환(曺成煥), 이강(李剛) 등이 청도에 모여서 당면 문제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토론하였으니 이를 청도회의라 한다.

그런데 회의 초반부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급진파와 점진파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서․북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의 재력과 인력을 규합하여 당장에 일본에 대한 무력적 항일운동을 일으키자는 급진파와 우선 서․북간도, 러시아령, 미주 등에 재류하는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서 좋은 기회가 돌아오면 큰 힘을 낼 수 있도록 실력양성을 하면서 장래에 기회를 엿보자는 점진파의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인데, 급진파의 대표자는 이동휘였고 점진파의 대표자는 도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산과 깊은 친교가 있었던 이갑이 급진론과 점진론의 중재안을 제시하였는데 독립투쟁도 중요하나 그에 못지않게 실력양성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갑의 이러한 중재안도 효과를 얻지 못하여 청도회의는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결국 도산과 이갑은 당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하여 떠나고 다른 동지들도 각각 목적하는 곳으로 떠나기에 이르렀다.

덧붙이면 도산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갑과 작별하고 베를린에 잠시 머무른 후에 런던을 거쳐서 미국에 입국하였다.

도산은 미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으며, 그곳에는 부인을 비롯하여 2남 1녀의 자녀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여러 친우와 동지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사실 도산이 고국(故國)으로 돌아간 이후 부인은 삯바느질을 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였는데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 또한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처음에는 토목공사의 인부로 일했지만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서 서양인 주택을 소제하는 인부로 일하였다.

아울러 도산은 병세가 심상치 않은 이갑의 치료를 위하여 동지들과 의논하고 여비와 함께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主筆)로 초청한다는 여행증명서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냈으며, 이갑은 191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여 독일 함부르크를 경유한 후 뉴욕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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