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 (13)
[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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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19년 도산(島山)은 노령에 있는 이동휘(李東輝)를 상해로 불러들이고 ‘임시 헌법개정안’을 9월 초순 통과시키고 노동국 총판이란 한직으로 물러났으며 특히 임정을 옹호, 강화하는 데 전력하였다.

또한 흥사단(興士團)의 창설자로서 상해에 원동지부를 두어 주로 해외에서 활용했으며,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는 흥사단의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서울에서 도산의 지시로 설립하고 그 후에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동우회(同友會)로 변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표면 단체였으며 흥사단 운동은 전 민족을 목표로 하는 민족운동의 훈련단체이기 때문에 비밀로 할 수가 없었다.

1921년은 도산이 임정의 내부 수습을 위하여 노력한 시기인데 도산은 정치적 책임을 이유로 그해 5월 국무위원을 사임하였으며, 도산은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주창하였고 2년 이상의 노력으로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막하고 부의장으로 피선되나 이 회의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와 관련해 독립운동의 선두에 서서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던 도산은 중요한 구상을 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사단의 사업을 확대한다. 둘째. 이상촌 건설을 실현한다. 셋째. 대독립당을 조직한다. 넷째. 이상과 같은 사업을 위하여 미주의 동지들을 방문한다.

한편 도산은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노선을 통일하고 그 방략(方略)을 새롭게 수립하기 위하여 각지에 흩어진 지역과 단체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150여명을 상해에 결집시켜 1923년 1월에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와 관련해 국민대표회의는 1월 3일에 회의를 시작하여 5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되었으며, 휴회도 거듭되었지만 이처럼 많은 대표들이 오랜 기간 동안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남만주의 핵심 독립운동가 김동삼(金東三)이 선출되었으며, 부의장은 윤해(尹海)와 도산(島山)이 선출되었다.

김동삼은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도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쟁점은 임정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문제였는데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의 의견이 임정을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바람에 회의의 진행이 원활하지 못했으며, 김동삼을 비롯한 지도부 인사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선 쉬운 문제부터 다루기로 하였으나 5월에 접어들어 주된 쟁점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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