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14)
[박관우 칼럼] 선각자 도산 안창호 고귀한 생애 재조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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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 인사들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서간도지역 독립운동계는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하여 전부 사임하였으며, 부회장이었던 북간도 대한국민회 대표 윤해(尹海)가 의장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부의장도 신숙(申肅)과 오창환(吳昌煥)이 새로 선출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동삼을 비롯한 서간도 독립운동계 인사들은 퇴장하여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어, 5월 15일 회의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말았다.

이것은 상해임정의 향후 진로를 두고 독립운동계가 양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무너지고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세운 임시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 이를 개조하거나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던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여 불협화음(不協和音)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창조파가 6월에 접어들어 국민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가을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는 목표를 갖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고, 이듬해 활동무대를 다시 만주로 옮겨 ‘조선공화국’또는 ‘한’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수립한다고 발표한 것도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산(島山)은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끝났지만 1923년 7월 2일 윤자영(尹滋瑛), 김철(金澈), 홍진(洪震), 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임시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각원의 개선과 임시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또한 도산은 반임시정부 세력과 협의를 계속하여 북경을 비롯하여 북만주, 서간도, 천진 등의 세력과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24년 1월 북경에서 만주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이동하여 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회합하고 2월에 상해로 돌아왔다.

한편 상해로 다시 돌아온 도산은 대동통일 취지서를 발표하고 통일운동에 각 단체대표들이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1924년 5월 독립군 대표들이 도산의 취지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도산은 이러한 과정을 체험하면서 여러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한 끝에 임시정부 초반부터 구상하였던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대독립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근거지 마련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금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으므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동지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도산은 다시 미국으로 가서 1년 동안 국민회(國民會)와 흥사단(興士團)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마침내 대독립당과 이상촌(理想村)과 더불어 흥사단의 원동지부의 발전계획과 동지(同志)들이 보내준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돌아왔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만주뿐만 아니라 관내에까지도 일본의 세력이 뻗고, 이어서 일본은 상해까지도 침략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야심차게 추진하였던 계획을 보류하였다.

여기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도산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였던 이상촌 건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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