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몇 년 전부터 필자에게 메일을 보내주는 자가 있다. 그자에게 온 메일 내용들은 대개가 과격한 편이고 현실 비판적이다. 단순히 재밋거리와 비현실적인 내용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정치 선동에 가까운 무모한 내용도 들어 있어서 한 번도 회답해준 적은 없지만 줄기차게 보내오고 있다. 이번에 보내온 ‘침묵의 방조자’라는 제목의 메일은 중국에서 일어난 ‘어느 버스 사고’ 실화 이야기라고는 전제하지만 이 역시 의식 변환과 관련 있는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의 줄거리인즉 2001년, 중국에서 어떤 여성 버스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양아치가 이 기사한테 달려들어 성희롱했다. 승객들은 모두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어느 중년 남성이 양아치들을 말리다가 심하게 얻어맞았다. 마침내 양아치들이 시외 한적한 곳에 버스를 세우고 여성 기사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서 성폭행했고, 한참 뒤 양아치들과 여성기사가 차에 올랐는데, 여 기사는 조금 전에 양아치를 만류했던 중년 남자한테 다짜고짜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중년 남자가 황당해 하면서 “아까 내가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여 기사가 소리 지르면서 “내리지 않으면 출발 안 한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버티었다.

중년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아 차에서 내리지 않자 승객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서 짐도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나서 버스가 출발했는데 여 기사는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서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다. 도중에 쫓겨난 중년 남자 한 사람을 뺀 승객들과 여 기사, 양아치 세 사람은 추락사고로 모두 사망하고 말았는데, 그 사실도 모르고 중년 남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 산길을 걸어가다가 언덕 아래로 떨어진 차를 보았다. 현지 교통을 정리하던 경찰관으로부터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이 모두 죽은 사고라 들었고,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버스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시사하는 바는 곤궁에 처한 여성 버스 운전자를 보고도 ‘나 몰라라’ 방조하고 있던 승객들이 불의에 항거하던 중년 사내를 버스 밖으로 쫓아낼 때는 모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여성 기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폭행한 양아치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용감히 나서서 양아치들의 악행을 막았던 그 중년 남자를 일부러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양아치와 불의를 보고서도 외면했던 승객들을 모두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다. 만약 여성 운전사가 우리 가족이었다면 외면했을까,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름을 보고서도 옳음을 행동하지 아니하는 ‘침묵의 방조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교훈적 이야기를 남긴다.

중국에서 일어난 실화라고 했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현상을 꼬집은 내용일 수 있다. 여성 운전자는 사회적 약자이거나 어쩔 수 없는 현실도피자, 항거했던 중년 남성은 양심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노력하는 선각자, 지성인 등 진정한 영웅의 자질을 갖춘 사람일 테고 양아치들은 가해자, 권력자 또는 잘못된 제도 자체일 수 있으며 사고를 당한 승객들은 방관자들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제목을 굳이 ‘침묵의 방관자’라 하였음은 불의에 침묵하고 옳은 일에 나서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자는 이야기 속 양아치나 승객들처럼 좋지 못한 경우를 당할 수 있다는 전제로 보여 필자 마음이 싸하다.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제도로 인해 약자가 더 힘든 삶을 살고, 악덕 경제인들과 못난 정치인들이 부의 마력이나 권력에 재미 붙여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다수 부류들이 ‘나와는 무관함’을 내세워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다.

서두의 언급과 같이 ‘○○산’이란 닉네임의 그 사람에 대해선 모르지만 보내오는 메일 내용의 유형으로 보아서는 아마 그자는 글에 대한 관심도 있으려니와 현실 정치에 관해서도 상당히 지적 깊이가 있는 자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생각하는 바와 필자 주관이 달라서 지금껏 많은 자료를 읽고서도 그냥 참고하고 흘려보냈을 뿐인데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 가만히 있으면 진짜 침묵의 방조자로 전락할 것만 같은 생각에서다. 하여 필자는 그 메일 내용과 관련해 중국 후한시대의 선각자(先覺者) 왕충이 쓴 ‘논형’을 끄트머리에서 적어본다.

“가짜가 진실한 것보다 잘난 체하고 진짜가 거짓에 의해 난도질당하는데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 옳고 그름이 바로잡히지 않는다. 이는 자주색과 붉은색을 뒤섞는 것이요, 기왓장과 보옥을 한데 쌓아놓는 것이다. 사물의 경중을 가려 서술하고 참과 거짓의 표준을 세우기 위하여 ‘논형’을 썼다”는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니, 침묵이 어찌 금일까 보냐.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