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내전으로 30만명 사망
120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
처음은 정부 반대 시위에서
종파 갈등으로 내전 확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연합뉴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연합뉴스)

외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굵직한 이슈 중 분쟁과 전쟁은 단골손님이다. 그중 종교분쟁은 사상‧이념‧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양상을 보이곤 한다. 대표적인 종교분쟁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당사자인 소위 ‘이팔 분쟁’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개신교 등 굵직한 종교가 얽혀 성지를 놓고 다툼을 한 지 벌써 75년이다. 이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가 얽힌 분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것일까. 본지는 기획 연재를 통해 각국 종교분쟁을 조명하고 분쟁의 심각성을 재조명하고, 평화의 필요성을 살펴본다.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지난 2011년 발발한 뒤로 큰 상흔을 남긴 중동 지역의 장기 내전인 시리아 내전의 피해는 참혹하다.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내전 발발 이후 2021년 기준 약 38만 70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1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토록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십수년간 해결되지 않던 데에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시리아 내전 역시 여타 중동의 분쟁과 같이 복잡한 양상을 보이지만, 하나 공통된 것이 있으니 바로 ‘종교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해서 시리아 내전을 중동의 대표적인 종교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정부 반대 시위가 시작

먼저 시리아 내전은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아 2011년 3월 15일 시리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시작됐다. 아랍의 봄은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진행된 민주화 시위다. 1971년 쿠데타(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로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전 대통령과 2000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감옥에 가두는 등 40년 넘게 시리아를 독재적으로 다스렸다.

시리아인들은 이들의 독재와 세습 행위에 반발해 “바샤르는 대통령에서 물러나라”라며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사건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반군이 생겨나 정부군과 싸우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근본엔 ‘이슬람 수니파-시아파 갈등’

이런 가운데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대립은 내전을 키우는 원인이 됐다.

시리아 내 이슬람은 소수 종파인 시아파(13%)와 다수 종파인 수니파(74%)를 믿는 이들로 나뉘어 있다.

특히 당시의 시리아 정부는 시아파 내에서도 소수 종파였던 ‘알라위파’였다. 알라위파는 일반적인 이슬람과 달리 죽음 이후 지상의 행위에 따라 환생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믿는다.

정권을 잡은 시리아 정부는 국민의 70%에 달하는 수니파를 강압적으로 지배했다. 갈등의 골은 이미 깊은 상태였던 셈이다.

반군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졌고 이때 주변국들이 개입하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분쟁 초 대표적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종교적인 이유로 정부군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반면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반군을 도왔다.

이후 시리아 정부군의 폭격에 터키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자 터키도 보복 공격을 감행하면서 내전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와 좋은 관계였었다는 이유로 시리아 정권을 적극 지원했고, 미국은 이란과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반군 편에 섰다.

혼란을 틈타 수니파에서는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생겨나며 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 IS는 시리아 동서부와 이라크 북부를 점령하는 등 점차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시리아인이 IS에 의해 참수되기도 했다. 시리아 정부는 반군과 동시에 IS와도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시리아 내전이 이슬람국가(IS) 패퇴 이후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1967년부터 점령하고 있는 골란고원에 11일(현지시간) 대공미사일 아이언 돔이 배치돼 있다. 2018.2.12 (출처: 뉴시스)
시리아 내전이 이슬람국가(IS) 패퇴 이후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1967년부터 점령하고 있는 골란고원에 11일(현지시간) 대공미사일 아이언 돔이 배치돼 있다. 2018.2.12 (출처: 뉴시스)

이런 내전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는 건 바로 시리아 국민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대적인 공습과 포격으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수많은 이들이 숨졌다. 전쟁으로 인해 35만명이 넘는 시리아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인구의 절반은 고향을 떠나 타지를 전전해야 하는 난민 신세가 됐다. 부실한 배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올라탄 채 이동하는 도중 배가 난파돼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은 연일 국제뉴스 지면을 채우며 세계인들을 울렸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선 이유는?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였던 무함마드는 간질로 추정되는 질병을 앓다가 결국 AD 632년에 생을 마감한다. 무함마드가 미처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탓에 그를 따르던 무슬림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후계자 문제에 관해선, 수니파는 공동체 합의를 통해 적임자를 뽑는 일명 ‘계승파’였고,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일명 ‘혈통파’였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르크’를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초대 칼리프(지도자)로 추대한다.

결과는, 수니파의 승리였다.

하지만 시아파의 뜻대로 알리를 제4대 칼리프로 세우면서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암살당하자 다마스쿠스 총독이자 오스만의 친족인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가 이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우마이야 가문과 하심 가문 간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은 수니와 시아로 양분되고 알리가 죽으면서 '무아위야'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각 분파는 저마다 세력을 확장 및 정착하며 안정을 취했고 종파끼리 결속하는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이슬람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같은 나라일지라도 수니파 종주국과 시아파 종주국 간의 구분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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