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2.65평 또는 1.23평. 항일저항운동으로 일제와 격렬한 대치가 이뤄졌던 그 시대! 서대문형무소의 여성독립운동가에게 허락된 공간은 한두 평 남짓했다. 2.65평의 큰 방에는 10~11명, 1.23평의 작은 방에는 5명 정도가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미 옥사의 수용인원 한계를 초과한 상태였다. 당시 감방면적당 수용밀도가 평당 2.9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여성수감자는 이미 그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으로 개소된 이래, 서대문형무소는 의병운동과 항일저항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무차별적인 체포와 투옥의 집결지였다. 1918년 말에는 1만 2249명, 1919년 1만 5725명, 1930년 1만 6677명 등 수용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수감자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일제의 수감·재판·사형 등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분명 그곳에는 민족생존의 이유가 숨 쉬고 있었다.

전체구조에서 별개의 2개 동으로 분리돼 수감됐던 여성독립운동가는 학생, 교사, 간호사, 선교사, 상인, 농업인, 언론인 등 폭넓은 직업만큼이나 옥고를 치른 연령대도 10대에서 60대 이상에 걸쳐 분포했다. 3.1만세운동에서 체포자의 다수를 차지했던 서울 시내 여학생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올라와 체포됐던 이들은 구류, 미결, 무기징역으로 형량이 부과됐는데, 그 형량은 곧 일제에 대한 불복종의 강도를 의미했다. 그리고 가로 15cm×세로 10cm의 작은 종이에 간단한 정보로 남겨진 181명의 여성독립운동가 흔적…. 바로 서대문형무소 역사의 또 다른 흔적이다.

181명. 이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인원의 전부는 아니다. 서대문형무소뿐 아니라 평양형무소와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된 이들까지 생각한다면, 일제에 항거했던 여성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그런데 현재 서대문형무소에 수형기록카드가 보존돼 있는 181명 중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이는 단 13명에 불과하다. 이런 사실은 단순한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기록물에만 의존해 행적을 가늠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치를 살펴보게 한다.

일제의 잔악함과 폭력성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서대문형무소와 독립운동가의 고통을 떠올린다면, 전국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이들의 행적을 대변하고 명예를 복권하는 데 주력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의 모색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대한독립 만세’ 외침이 얼마나 절망과 간절함을 담고 있었던가를 상기하는 ‘기억의 역사’로 존중받아야 할 지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에게 두려웠던 장소의 의미를 넘어서서 옥중독립운동으로 승화된 민족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곳이자 치열했던 민족투쟁의 장이었다. 그리고 그 곳의 한켠에 여성독립운동가의 민족독립을 향한 피맺힌 염원이 숨 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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