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경남 마산(馬山)은 19세기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항구도시로 주목받았던 지역이다. 1899년 마산포(馬山浦)가 개항장이 된 이후, 경남도의 해상상업 중심지이자 무역과 상품유통의 중심포구로 부각되면서 마산에는 각국의 영사관 부지와 공동 조계(租界) 등이 들어섰고, 마산과 삼랑진을 연결하는 군용철도의 개통으로 내륙과 소통이 더욱 활발해졌다. 반면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문물교류, 종교유입, 한일상권경쟁 등이 가시화되면서 시대변동에 민감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든 1915년 11월 17일. 마산시 성호동에 울린 우렁찬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는 이후 일제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당찬 목소리로 변모한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부친 김규태와 모친 허영 사이에 태어난 김두석(金斗石, 1915.11.17~2004.1.7)은 근대 종교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 성장하면서 부산 동래일신여학교에 진학해 민족현실과 시대변화를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졸업 이후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지만, 1935년 11월 일제의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명령은 그녀를 암흑의 소용돌이에 놓이게 했다. 당시 전국 교계에서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인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표명했는데, 평양의 숭실학교,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등을 시작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임을 강조해 무조건적인 참배를 강요하면서 그 여파는 한국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주말예배를 시작하면 일본 경찰은 동방요배(또는 궁성요배)와 일장기 경례를 강요하고 시행 여부를 감시했다. 그때 김두석은 신사참배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기를 반복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됐고 교사직도 해임 당하게 된다.

이후 김두석은 1940년 4월 평양여자신학원에 입학을 한 후에도 1940년 5월 17일부터 1941년 7월 30일까지 다시 신사참배 거부와 일제 식민지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면서 5회에 걸친 구금과 28일간의 옥중 수감생활을 겪어야 했다. 석방된 후에도 마산으로 돌아왔지만, 1942년 8월 신사참배와 일본비판 문제로 다시 피체돼 1944년 9월 1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다.
철저하게 일제가 요구했던 신사참배 강요는 그 시대에 드리워진 그늘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동북아시아의 이슈로 국가교류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침울했던 시기, 신사참배 문제에 당당히 맞서며 ‘옳고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했던 마산여성 김두석! 그녀의 온건(穩健)한 나라사랑 정신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실을 되짚어본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