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28년 1월 1일.
국내의 어려운 여건 속에 해외유학길에 올랐던 조선 여성들이 뉴욕에 모였다. 비록 조국을 떠나 미국유학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조국광복의 꿈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여학생들이었다. 앞서 이들은 1919년 일본 2.8독립선언에서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던 재일유학생, 국내 3.1운동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던 학생, 그리고 근대교육을 수학했던 여성지식인이자 여성리더였다.

김마리아(회장), 황에스더(총무)를 비롯해 이선행, 우영빈, 안헬른, 윤원길, 박인덕, 주영순 등 그곳에 모인 발기인과 회원들은 무궁화꽃의 의미를 담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했다. 그렇게 일제탄압에 대항하는 조선여성들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향한 행보는 뉴욕을 넘어서 국내로 전달됐다. 근화회(槿花會)는 그 목적과 취지가 분명했다. 1) 조국광복촉진을 위한 재미한인사회의 후원독려, 2) 여성동포의 애국정신고취 및 대동단결강조, 3) 대미한인의 선전사업협조 및 국내정세소통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조선여성의 대외활동을 위한 공식적인 신호탄을 알렸다.

국내여성과 해외교민사회간의 소통통로를 확보하려는 공식적인 움직임이 알려지자 국내외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1928년 4월 5일 신한민보에 소개된 ‘뉴욕 근화회(槿花會)’의 기사 및 게재된 시(詩)에는 당시 의도한 바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천만 성명, 도탄에 울고, 삼천리 빛 잃어 캄캄하도다. 주야로 그리는 우리 동산, 언제나 무궁화 다시 피랴. 나라의 자유, 민족의 복락의 길, 개척할 이 그 누구냐…’ 라는 내용으로 조선 여성의 의기 있는 외침을 일축했다. 이러한 근화회 조직을 이끌었던 이는 바로 김마리아였다.

김마리아(1892-1944)는 일제강점에 맞섰던 대표적인 한국여성지도자로, 민족독립을 위한 가열찬 투쟁을 보여줬던 여성이다. 그러나 3세에 아버지, 1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근대여성지식인으로 성장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 정신여학교 교사를 재직했고, 일본 동경유학과 2.8 독립선언 참석,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일제의 주 감시대상으로 주목받았다.

투옥과 망명으로 중국과 미국 유학생활을 두루하면서 여성 인재로 성장했다.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 연구생, 파크대학을 졸업한 뒤 근화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여성의 국외행보를 공식화했고, 이후 콜롬비아대 사범대를 수학, 한국학생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돼 해외유학생을 규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염원했던 김마리아는 시대의 그늘에 눌려 있었던 조선 여성의 차별과 일제에 대한 비판은 물론 조국과 민족의 진취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피력했던 여성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굴복하지 않았던 의기(義氣)의 여성, 김마리아! 이런 한국 여성의 강인한 조국애가 독립운동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기에 조국광복이 앞당겨졌는지도 모른다.

왜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겨야 하는가? 이 물음은 역사가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늘 되새겨야 할 우리의 사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혈맥에 조국과 민족의 기운이 흐르고 과거 조국광복을 위해 의로움을 펼쳤던 선조들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우리가 새겨야 할 사명이자 자각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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