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37년 6월 12일.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의 삼중고를 극복하며 인간교육의 승리를 일구었던 헬렌 켈러 여사는 대구의 아름다운 교정, ‘신명여학교의 신명동산’에서 있었다. 인간 승리의 기적을 일군 인물인 헬렌 켈러 여사의 대구 방문기록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헬렌 켈러 여사와 앤 설리번 선생의 실화를 기억하고 있고, 이들의 행적은 지금도 전 세계인으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장애학생과 선생님의 현실을 뛰어넘었던 행보와 의사소통방식은 장애라는 편견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헬렌 켈러 여사를 여성참정권자, 평화주의자, 자유 인권 협회(ACLU)의 설립에 기여한 인물로 존경받게 했다.

신명여학교의 폴라드 교장 사택 앞에 눈빛을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던 전교생 167명은 잔디밭에 앉아 수행 비서를 대동하며 등장한 헬렌 켈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여사와 학생은 모두 ‘장애’를 공감하고 있었다. 이들의 ‘장애’는 물론 다른 차원이었지만 충분한 공감을 이룰 수 있었다. 신체의 장애를 넘어선 여인과 시대적 장애의 틀에 갇혀 있었던 여학생의 현실적 장애는 잔디밭에서 고스란히 교집합의 범주에 들어섰다.

1902년 5월 10일. 선교사 부마태(Martha Scott Bruen)여사의 주도로 의료선교사(Woodbridge O. Johnson M.D) 부인(Edith M. Parker)의 바느질반과 15세 미만 소녀 14명으로 구성된 놀스(NOurse) 선생의 학생으로 시작된 대구선교지부의 활동은 이후 신명여자소학교의 설립과 개교로 이어진다. 그리고 1907년 10월 15일 ‘신명여자중학교’로 교명이 인가됐다. 그런데 신명여학교의 설립은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폴라드 교장의 주도로 미국 북 장로회 각 교회의 부인들에게 호소해 기부 받은 2000불과 북장로회 본부에서 원조 받은 2000불로 학교 설립은 추진됐던 것이다.

‘정의(正義)’를 우선으로 내세웠던 폴라드 교장의 교육정신이 미국 여성과 한국 여성의 가슴에 전달되어서였을까? 아니면 ‘정의는 국경을 초월하고, 감정을 초월한다. 그러한 이해를 넘어선 곳에서 그 값어치의 의미는 부각된다’고 했던 폴라드 교장의 언설에 공감해서였는지 이들의 공감요인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일구어진 신명여학교는 한국 속의 평화를 추구한 몸짓이었다. 시대의 제약과 그 속에 잉태됐던 신명여학생의 몸짓은 1923년 9월 2일 대구 신명에서 조직된 YWCA, 양지회, 성심회의 발족으로 이어지며 한국여성의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독립운동의 투신으로 이어졌다.

‘미래 코리아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Girls! Be ambitious!)’고 외쳤던 헬렌켈러의 연설이 신명여학교의 잔디에 퍼졌을 때, 숨죽이고 있었던 신명여학생의 가슴에는 평화의 불씨가 지펴졌다. 그리고 희망이 피어나길 소망하며 ‘코리아의 미(美)’를 극찬했던 헬렌켈러의 연설은 그들을 자발적인 민족저항의 주체로 이끌었다.

암울했던 시대의 그늘에 갇혀 있었던 여학생의 가슴에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두드렸던 헬렌 켈러! 여사의 세계평화의지가 담겨져 있었던 연설은 시대의 암울함을 뚫고 일어서길 희망했던 메시지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저항과 민족독립으로 신명여학생을 이끌었던 또 다른 저항과 희망의 불씨로 기억된다.

▲ 신명여자중학교 1918년 6회 졸업생 (사진출처: 신명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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