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연재기획 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조선 말 농민들은 대부분 가난에 허덕이며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활 속 깊이 뿌리내린 사회 문제를 극복하고 싶어 하는 민중들은 궁핍한 생활과 불평등 의식을 타파하고 더 나아가 인간 존엄성 회복이라는 열망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철종 13년(1862년)부터다. 평등사상과 보국안민의 정신을 외친 동학이 창도되는 1860년도와 당시 사회 상황과 맞물리며, 동학은 농민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게 됐다. 고종 25년(1888년) 민란 등 농민봉기는 전국적으로 일어났기 시작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국에서 60여 차례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후천개벽사상 등으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대신사는 조선왕실의 탄압으로 1864년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후 1871년 동학교도인 이필제는 교조 수운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펼치며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지방수령을 죽이는 반란 성격의 혁명운동으로 전개된다. 동학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신사와 동학의 접주(동학교단 조직의 지도자)들이 적극 가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의 참혹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됐다.
지하로 숨어들어 간 동학은 최시형 대신사의 왕성한 포교활동으로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아 재건하게 된다. 급기야 종교정치세력으로 급성장을 이루게 됐다. 1892~1893년 충정도 공주, 전라도 삼례,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등으로 연결되는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포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움직임으로까지 확산된다.
하지만 이 같은 열망은 철저히 무시되고, 조선왕실의 교조신원운동 묵살과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다. 동학 지도자들은 보국안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 제폭구민(폭도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함) 등의 기치를 내걸고 전봉준 장군을 선봉에 세워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다.
◆동학 창도… 후천개벽사상 알리다
동학(천도교)은 1860년 4월 5일(음력) 경상도 경주군 현곡면 가정리 용담성지에서 수운 최제우 대신사에 의해 창도됐다. 최제우 대신사는 ‘한울님(하느님)이 자신의 몸에 모셔져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교리를 통해 하늘 아래 누구나 하나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라며 평등사상을 전했다. 그는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사람을 하늘님 같이 섬겨야 한다’는 시천주 정신이 깃든 후천개벽의 사상을 낳았다. 조선시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봉건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세상(개벽)의 실현을 선포한 것이다.
동학사상은 지배계층의 수탈에 궁핍한 삶으로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평등사상과 사람이 하늘님(한울님)과 같은 존엄한 존재라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임금이 하늘을 대행하는 절대권력의 군주라는 사회인식 속에서, 백성이 하늘 곧 왕과 같은 신분이라고 외치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선언은 농민혁명의 촉매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로 인해 최제우 대신사는 1861년 12월 중순경 경상도 경주에서 관의 탄압을 피해 전라도 남원으로 오게 되고 선국사 은적암에 머물며 당시 ‘무극대도’ 즉 천도라 하던 도의 이름을 처음으로 ‘동학’이라 선포한다. 조선 정부는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동학교도들을 역적 세력으로 몰아 1864년 수운 최제우를 참형에 처한다.
최제우 대신사의 참형에도 동학은 민중들 깊숙이 파고들며 세력을 확산해 간다. 이는 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신사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최시형 신사는 삼남(전라도·충청도·경상도)일대에 대중포교에 혼신을 쏟았다. 1892~1893년 교조신원운동에서 출발한 동학운동의 봉기는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연결돼 역사의 큰 획을 긋는다.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전북 전주) 이윤영 관장은 120주년을 맞아 동학을 집대성한 ‘동학역사이야기’를 발간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 관장은 동학과 관련해 수십 년간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동학혁명 발상지와 유적지를 발품을 팔아 얻은 자료를 엮어 왜곡된 지식을 바로잡아 동학혁명 정신을 적극 알리고자 하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12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개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이어 “1894년 고부 농민봉기가 도화선이 돼 일어난 동학혁명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뿐 아니라 상생과 공존의 의미가 담겨 있다”면서 “120년 전 동학혁명은 백성들의 민주(주권이 국민에게 있음)화 요구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하며, 현 시대의 우리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과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동학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보국안민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대종교 홍수철 총전교 취임
- 문창극 논란에 개신교계 갈려 “총리 지명 철회” vs “마녀사냥 중단”
- 프란치스코 교황, 방탄차 미사용 재천명
- 감리회, 지난해 입법의회 ‘무효’ 결정
- 대법원, 한교연 대표회장 ‘업무상 횡령’ 인정
- 故 최태용 목사 “신 섬기듯 일본 국가 섬겨야 해” 주장
- 수많은 무명 순교자가 묻힌 ‘해미성지’를 찾다
- 불교계, 문창극 총리지명 철회 촉구 한목소리
- 프란치스코 교황 공식 방한 일정 발표
- 전봉준 “한탄하는 백성 위해 핍박 제거하라” 혁명 횃불 드높여
- 나라 구하려 ‘생명’ 버린 민초들, 항일독립운동 선봉에 서다
- “이 시대는 온 세상 거듭나야 할 때, 天心 회복해야”
- “동학농민혁명, 세계사에 내세울 수 있는 역사”
- 민주화운동 효시 ‘동학농민혁명’… 이 시대 다시 꽃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