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접주(천도교 지도자)이자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이 관군에 체포돼 서울(경성)로 압송되고 있다. 전봉준은 1894년 12월 2일 체포된 후 일본군에 넘겨졌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진제공: 동학혁명기념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연재기획 ②

가진 자와 없는 자 상생·공존
빼앗긴 재물 빈민에게 돌려줘
‘농민군을 의군으로 찬미’ 기록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조선시대 말 사회 변혁의 물꼬를 튼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 가운데 전봉준 장군은 빼놓을 수 없다.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시대적 상황에서 단순한 민란이 아닌 조선사회의 획기적인 개혁을 꿈꾸며 동학농민혁명의 선봉에 섰다. 몸이 왜소했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던 전봉준은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그가 최하계층인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고 함께 혁명의 횃불을 높이 들 수 있었을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그의 뜻과 포부는 전봉준의 심문기록인 ‘전봉준공초’에서 찾을 수 있다. 심문관이 “너는 해를 당함이 없는데 소요를 일으킨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전봉준은 “나 자신이 핍박당한 것을 풀기 위해 봉기함이 어찌 남자된 자의 행동이겠는가? 많은 사람이 원통해하고 한탄하는 까닭에 백성들에 대한 핍박을 제거하고자 해서 일으켰다”고 답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까닭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민초들 곧 백성들의 고통과 핍박, 한탄하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존중과 평등사회, 민주화의 실현을 위한 불굴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전봉준과 농민군의 정신은 일반 대중들과의 ‘상생’을 실천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상생정신 실현한 전봉준

상생(相生)은 음양오행설에서 기인한다. 금(金)은 수(水)와, 수는 목(木)과, 목은 화(火)와, 화는 토(土)와, 토는 금과 조화를 이룸을 이르는 말로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동학(천도교)의 정신에서 상생을 찾을 수 있다.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는 가진 자(富者)와 없는 자(貧者)가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이 같은 가르침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상생의 실천적인 삶을 이끌어냈다. 유무상자의 정신은 최제우의 동학 창도 이후 동학의 이념적 실천적 행동기준이 됐다.

1894년 5월 8일 전봉준은 초토사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의 실행을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관군에게 넘겨줬다. 그는 청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한 급박한 상황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홍계훈의 관군과 협상을 통해 전주화약을 맺었다. 전주화약은 지극히 상생의 관점을 견지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1894년 7월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관과 민이 함께 통치하는 형태)의 원칙에 따라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 설치를 합의하고 김학진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약 2개월간 집강소를 통한 농민자치를 실현했다. 이 또한 상생의 실천적 결과라 볼 수 있다.

전봉준은 동학교도이지만 조직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이에 그는 손화중·김개남, 그리고 최시형·손병희 등 주요 동학지도자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나눔과 배려’ 백성의 시름 보듬다

동학농민군들은 혁명 전개과정에서 철저히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실천했다. 1차 봉기 때에도 농민군들은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게 빼앗아 간 곡식이나 부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그것을 빈민들에게 돌려줬다.

동학농민군들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드러난 대목은 농민군들이 전라도 영광에 주둔하던 1894년 4월 12∼16일 사이에 발표한 ‘대적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이다. 농민군은 반드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을 지켜야 했다. ‘약속 4항’에는 인명을 중시하는 내용이, ‘12조 계군호령’에는 부정하고 탐학한 자들에 대한 경계,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배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헌에는 ‘농민군이 항상 부자로부터 재물을 탈취해 빈곤자를 진휼하고 혹은 약탈한 미곡을 시가에 비해 저가로 판매했으며 오직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짜서 치부한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을 뿐 양민을 전혀 괴롭히지 않아서 의적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라고 돼 있다. 또한 일본 공사관 보고 자료에는 ‘인민들이 농민군을 의군으로 여겨 내심 찬미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기록돼 있다. 농민군을 이끈 전봉준의 정신은 동학농민혁명을 관통하면서 상생, 그리고 나눔과 배려라는 형태로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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