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왕조가 망할 무렵이 되면 당당하던 천자의 위풍이 무너진다. 역심을 품은 사람은 그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거나 무력을 동원해 군주를 위협한다. 형세와 결말이 분명해도 패자에게 정권교체는 죽음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결전은 불가피하다. 정치투쟁에서는 유불리를 떠나, 충성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도 많다. 쌍방은 전력을 다해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모략의 고수는 혼전의 와중에서 조용히 발을 빼고 냉정한 판단으로 대세를 장악해 대업을 성취한다. 578년, 북주의 무제 우문옹(宇文邕)이 죽고 태자 우
[천지일보 영주=장덕수 기자] 지난 6월 1일 지방선거를 통해 출범한 민선8기가 8일자로 100일을 맞이한 가운데, 박남서 영주시장은 선비세상 개장, 2022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 개최 등 어느 때보다 바쁜 100일을 보내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민선 8기 영주시정을 지휘해 온 박남서 영주시장은 “당선 이후 지금까지 젊고 활력 넘치는 경제도시, 힘 있는 문화도시를 만들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진 데 이어,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가시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고, 민선8기 슬로건인 ‘선비의 품격 도약하는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종회(鍾會 225~264)는 서예가로 유명한 종요(鍾繇)의 막내아들이자, 청주자사 종육(鍾毓)의 아우이다. 현학과 서예에 정통해 약관에 이미 요직을 거쳤다. 현학으로는 왕필(王弼)과 이름을 나란히 한 천재였다. 사마사와 사마소가 신임하는 책사였지만, 촉을 정벌한 후 불신지심(不臣之心)이 생겨 촉장 강유(姜維)와 결탁해 자립을 도모했다가 40세에 피살되고 말았다. 위(魏)에서 촉으로 투항한 하후패(夏侯覇)가 종회는 오와 촉의 걱정거리라고 평가할 정도의 능력자였지만, 그의 형 종육은 술(術)을 과시해 보전하기 어렵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죽림칠현 가운데 완적(阮籍), 혜강(嵇康)에 이어 3번째인 산도(山濤)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일찍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고향에서 은거하며 재능과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장(老莊)을 좋아해 명사 혜강, 여안(呂安)과 친구로 지냈다. 나중에 완적 등과 어울려 죽림지교를 맺었다. 혜강을 자기의 후임으로 추천했다가 절교장을 받았다. 그러나 여안 형제의 다툼에 개입했다가 종회(鍾會)의 모함에 걸려 죽게 된 혜강은 아들 혜소(嵇紹)에게 산도 있으니 고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증(愛憎)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중국사상 유의(劉毅)라는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자가 희락(希樂)으로 동진 말기에 재승박덕으로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가 망했고, 한 사람은 자가 중웅(仲雄)으로 동한 말기에서 서진 초기의 명신이었다. 중웅은 산동성 내주 출신으로 서한 성양경왕 유장(劉章)의 후손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중웅은 인물 평가를 좋아했다. 왕공귀족들은 본색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를 피했다. 평양에 살 때 태수 두서(杜恕)가 공조로 불렀다. 부임한 후 군리 100여명을 도태시키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양호(羊祜, 221~278)는 태산 남성 출신으로 자가 숙자(叔子)이다. 서진(西晋)의 유명한 전략가, 정치가, 문학가로 손오를 멸하고 삼국시대의 분열국면을 마무리하는 데 실질적인 공을 세웠다. 9세조부터 2천석 이상의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청렴하고 정직했다. 어머니는 후한의 대유학자이자 문학가인 채옹의 딸 채정희(蔡貞姬)로 조조가 아꼈던 채문희(蔡文姬)는 이모이다. 아내는 조위의 중신 하후패(夏侯覇)의 딸이었고, 누이 양휘유(羊徽瑜)는 사마사(司馬師)의 아내인 경헌황후이다. 일찍이 권력을 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진의 원제 사마예(司馬睿)는 산동성 낭야의 세력가 왕(王)씨의 도움으로 제위에 등극했다. 왕도(王導)는 승상, 그의 종형 왕돈(王敦)은 도독으로 6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장강에 주둔하여 최대의 세력을 형성했다. 세간에는 동진왕조를 ‘왕(王)과 마(馬)의 공동천하’라고 불렀다. 왕도는 소탈했지만 잔혹했다. 호족 왕개(王愷)가 잔치를 열었다. 피리를 불던 기생이 박자를 놓치자, 왕개가 화를 내며 그녀의 목을 잘랐다.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지만 왕돈만은 태연했다. 왕개가 미녀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면서 손님이 술을 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진(東晋)은 북방에서 이주한 서진의 세습귀족과 강남의 세습귀족이 연합해 세운 왕조로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관계가 중첩되어 있었다.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자 정치세력들은 이합집산하며 복잡한 정치투쟁을 이어갔다. 정권이 극도로 불안해진 것은 당연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산동성 낭야(琅邪)를 근거지로 세력을 떨치던 왕(王)씨의 보좌를 받아 등극했다. 왕도(王導)는 승상, 종형 왕돈(王敦)은 도독으로 강(江), 양(揚), 형(荊), 상(湘), 교(交), 광(廣) 등 6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장강에 주둔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몇 해 전 ‘연개소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드라마에서 수(隋)의 문제 양견은 용렬한 군주였다. 연개소문을 띄우기 위해서라지만 남북조시대라는 중국사에서 가장 오랜 정치적 혼란기인 남북조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왕조를 세운 인물을 지나치게 희화화했다. 후계자 선정을 잘못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드라마에서와 달리 양견은 상당한 정치적 능력과 지략을 지닌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사람을 쓰고 버리는 수법에 능했다. 어느 조직이든 권력자에게는 용인술이 가장 어렵다. 부하의 잘못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거나 명백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이어 촉한의 병권을 잡은 강유는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 출신으로 자를 백약(伯約)이라 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셨던 그는 후한 말 최고의 경학자였던 정현(鄭玄)의 학문을 좋아했다. AD 228년, 기산(祁山)으로 진출해 귀순했다. 당시 강유의 나이는 제갈량이 유비를 만났을 때와 같은 27세였다. 위군은 강유의 어머니를 인질로 확보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군부의 요직을 차지한 강유는 사실상 촉한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강유는 제갈량의 전략을 답습하여 적극적인 대위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