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죽림칠현 가운데 완적(阮籍), 혜강(嵇康)에 이어 3번째인 산도(山濤)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일찍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자랐지만, 고향에서 은거하며 재능과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장(老莊)을 좋아해 명사 혜강, 여안(呂安)과 친구로 지냈다. 나중에 완적 등과 어울려 죽림지교를 맺었다. 혜강을 자기의 후임으로 추천했다가 절교장을 받았다. 그러나 여안 형제의 다툼에 개입했다가 종회(鍾會)의 모함에 걸려 죽게 된 혜강은 아들 혜소(嵇紹)에게 산도 있으니 고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두 벗의 따뜻한 관계가 코로나와 추위로 잔뜩 주눅이 든 마음을 녹인다. 산도의 종조고는 사마의(司馬懿)의 부인 장춘화(張春華)의 모친이었다. 산도는 사마의가 죽고 뒤를 이어 집권한 사마사(司馬師)를 만나러 갔다. 사마사는 당대의 여망(呂望)이 드디어 관리가 되려고 한다고 반겼다. 사마사가 유명한 강태공과 비교할 정도로 산도의 능력은 대단했다.

사마씨의 신임은 대단했다. 사마사는 위원제 조환(曹奐)이 하사한 봄옷을 그대로 산도에게 줬다. 또 연로한 산도의 모친을 위해 지팡이까지 줬다. 산도는 관리의 임면을 담당하는 상서이부랑이 됐으나 여전히 가난했다. 사마사가 죽은 후 대장군이 된 사마소는 특별히 돈과 곡식을 보냈다. 또 연로한 산도의 모친에게는 지팡이도 보냈다. 산도는 화유(和逌), 종회, 배수(裵秀)와 친했다. 종회와 배수는 이권을 놓고 걸핏하면 다퉜다. 산도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촉을 멸한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소는 진압하러 가면서 업(鄴)에 있던 위의 종실을 감시하게 했다. 사마소가 나중에 서진을 세운 장남 사마염(司馬炎)을 산도에게 보내 가르침을 요청했다. 사마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사마소는 아들 사마유(司馬攸)를 형의 양자로 보냈다. 나중에 후계자를 정할 때, 사마소는 형의 양자인 사마유와 장남 사마염을 두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자문요청을 받은 산도는 국가의 안위에 따르라고 조언했다. 세자가 된 사마염이 직접 산도를 찾아가 감사했다. 사마염이 선위를 받아 즉위하고 서진을 세웠다.

죽림의 친구들은 혜강을 필두로 차례대로 죽었지만, 산도는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사마씨가 왕조를 세우고, 삼국시기의 분할국면을 마무리하기까지 산도는 중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했다. 사마염이 오를 멸한 후 지방의 군대를 해산하자, 치안의 문란을 이유로 반대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나중에 8왕의 난이 발생하자, 혼란을 통제할 군대가 없어서 서진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무엇보다 수많은 인재를 발탁해 국정과 행정에 기여한 것이 두드러진다. 육량(陸亮)을 임용할 때만 의견이 달랐다. 산도가 항변했지만 사마염은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육량은 뇌물수뢰죄로 파면됐다. 그가 추천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한 자료가 산공계사이다. 그러나 그가 인재를 선정한 과정을 두고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렸다. 산도는 필요한 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몇 사람을 골라 사마염의 의중을 물었다. 사마염이 넌지시 암시하면 정식으로 다시 추천했다. 보통 사람들은 산도가 임의대로 관리를 등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산도는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일을 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몇 차례나 나이와 병을 핑계로 사직했지만 사마염은 직접 조서를 내려 만류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도의 나이는 이미 70세가 넘었다. 그는 직접 산소에 봉토를 하고 송백을 심었다. 이부상서로 임명했으나, 모친상과 자기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러나 황후 양절(楊絶)이 서거하자, 어쩔 수 없이 낙양으로 돌아와 취임했다. 산도는 최고관직까지 올랐다. 그러나 노령과 병을 이유로 수 십 차례 사직표를 올렸다. 상서좌승 백포(白褒)는 산도가 조령을 위배했다고 비판했다. 산도는 사죄표를 올렸다. 사마염은 취임해서 그들의 입을 막으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산도는 다시 10년 동안 더 일을 하고 벗들의 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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