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동진(東晋)은 북방에서 이주한 서진의 세습귀족과 강남의 세습귀족이 연합해 세운 왕조로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관계가 중첩되어 있었다.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자 정치세력들은 이합집산하며 복잡한 정치투쟁을 이어갔다. 정권이 극도로 불안해진 것은 당연했다.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산동성 낭야(琅邪)를 근거지로 세력을 떨치던 왕(王)씨의 보좌를 받아 등극했다. 왕도(王導)는 승상, 종형 왕돈(王敦)은 도독으로 강(江), 양(揚), 형(荊), 상(湘), 교(交), 광(廣) 등 6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장강에 주둔하여 최대의 세력을 형성했다. 세간에는 동진왕조를 ‘왕(王)과 마(馬)의 공동천하’라는 말이 떠돌았다. 위협을 느낀 원제는 왕돈의 권세를 미리 제한하기 위해 심복으로 왕돈의 세력권을 포위했다.

왕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간신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남경을 점령했다. 원제의 곁에는 두 명의 종복만 남아 있었다. 원제는 말없이 군장을 풀고 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왕돈을 향해 ‘진작 이 자리를 차지하려더니 빨리 차지했구려. 백성들은 괴롭히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기백은 웅장했지만 이미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왕돈은 곧장 근거지인 무창(武昌)으로 돌아갔다. 원제의 아들 사마소(司馬紹)가 뒤를 이었다. 그가 명제(明帝)이다. 왕도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명제는 아버지에 비해 뛰어난 결단력과 모략을 지녔다. 사서는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했으며, 현명한 사람과 빈객들을 아꼈고, 문장에도 능했다. 당시의 명신이었던 왕도, 유량(庾亮), 온교(溫嶠), 환이(桓彛), 원방(阮放) 등을 모두 가까이 대했다. 성인의 옳고 그름에 관한 논쟁을 할 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또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으며, 장군들과 군사들을 잘 어루만져 주었다.”
이러한 인물이 황제가 되었으니 왕돈에게도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왕돈은 명제가 불효했다고 무고하면서 폐위하고자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왕돈은 군사력과 인맥에서 유리했으므로 명제를 충분히 제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의 방자해진 심복들끼리 서로 핍박하며 살육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더 이상 그에게 우세한 상황은 돌아오지 않았다. 힘에서 밀리던 명제는 우회전술을 채택했다. 그는 왕돈의 세력들이 내분을 일으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켜서 적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단양윤(丹陽尹) 온교는 원래 왕돈파가 조정에 심어 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명제의 사람이 되어 왕돈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할 정도로 변했다. 왕도는 왕돈의 신임을 받았지만 지금은 명제에게로 기울어서 오히려 그의 형이 하는 짓을 책망하게 되었다. 왕돈의 세력이 분화되자 원래 왕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세력들이 명제에게로 몰려왔다. 왕돈도 그러한 명제를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왕돈은 명제의 턱밑으로 다가왔다. 명제도 왕돈을 격파할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왕돈은 이 때 이미 병이 들어서 직접 지휘를 하지 못하고 형 왕함(王含)이 원수(元帥)로서 병력을 이끌었다. 왕돈의 출병은 군사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다. 명제는 왕돈이 죽었다고 발표한 다음 토벌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명제는 이미 중요한 승리요건을 선점했다. 전쟁은 명제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패전 소식을 들은 왕돈은 곧 죽고 말았다. ‘왕돈의 난’은 너무도 빨리 평정되고 말았다. 왕도는 여전히 동진에서 중용이 되었다. 정치투쟁에서 쌍방은 아무리 형세가 유리해도 각자에게 적지 않은 약점이 있으며, 누가 그러한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느냐가 승리의 관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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