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산동반도 동남쪽 린위시(臨沂市)는 인구가 1천만이 넘는다. 린위보다는 낭야라는 옛 지명이 더 친숙한 곳이다. 전체 면적의 60%가 얕은 구릉지대로 중국고대문명의 발상지인 기몽산구(沂蒙山區)이다. 위대한 문명의 저력 덕분인지 이 지역은 순자(荀子), 담자(郯子), 유홍(劉洪), 제갈량(諸葛亮),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협(劉勰), 좌보기(左寶貴) 등 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다. 현대에는 유소기(劉少奇), 서향전(徐向前), 나영환(羅榮桓), 진의(陳毅) 등 쟁쟁한 공산혁명가들의 유적이 많아 남아 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 해남서 왕 구하러 나선 윤선도 가던 중 1월말 삼전도굴욕 소식 이 땅을 다신 밟지 않겠노라며 제주로 향해 뱃머리 돌려 가다 해남 아래 위치한 보길도 만나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상(인조)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해남에서 들은 윤선도는 노복과 가솔을 이끌고 왕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다 1637년 1월 30일 도중에 왕자가 있던 강화도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반도 동남쪽에 있는 린위(臨沂)는 인구가 약 2천만이나 되는 큰 고장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야트막한 구릉지대가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한다. 약 40만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법 발달된 삶을 꾸렸다. 순자, 담자(郯子), 제갈량, 왕희지, 안진경, 유협(劉勰) 등 명사들도 이곳이 배출했다. 또 유소기, 서향전, 나영환, 진의 등 중공군의 전투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험준한 산과 수려한 전원풍경은 순박한 민속과 함께 독특한 관광자원이다. 은작산 한묘죽간박물관은 가장 많은 죽간을 비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이제 우리는 문학
「글마루」마루대문 - 군자의 향기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Ⅴ ‘세연지와 옥소대’‘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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