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반도 동남쪽 린위시(臨沂市)는 인구가 1천만이 넘는다. 린위보다는 낭야라는 옛 지명이 더 친숙한 곳이다. 전체 면적의 60%가 얕은 구릉지대로 중국고대문명의 발상지인 기몽산구(沂蒙山區)이다. 위대한 문명의 저력 덕분인지 이 지역은 순자(荀子), 담자(郯子), 유홍(劉洪), 제갈량(諸葛亮),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협(劉勰), 좌보기(左寶貴) 등 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다. 현대에는 유소기(劉少奇), 서향전(徐向前), 나영환(羅榮桓), 진의(陳毅) 등 쟁쟁한 공산혁명가들의 유적이 많아 남아 있다. 험준한 산과 수려한 전원풍경이 인문문화와 잘 어울려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리 친숙한 고장이 아니다.

시내 은작산(銀雀山)의 한묘죽간(漢墓竹簡)박물관은 1989년에 준공됐다. 중국에서 가장 큰 죽간박물관이다. 2좌의 한묘에서 출토된 북간은 7500매이다. 손자병법, 손빈병법, 육도, 위료자, 관자, 묵자 등을 비롯한 선진시대 고적이 포함됐다. 특히 손무와 손빈 두 손자의 병법은 1700년 전에 사라졌다가 되찾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손자병법은 233매로 상편 13편과 하편 5편이고, 손빈병법은 222매로 16편이다. 서성(書聖) 왕희지고거는 세연지가(洗硯池街) 20호에 있다. 왕희지는 서진시대인 303년에 린위에 속하는 낭야(琅邪)에서 태어났다. 모든 서체에 뛰어났지만, 특히 소흥(紹興)에서 행서로 쓴 난정서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아들 헌지(獻之)와 함께 중국서예사에서 ‘이왕(二王)’으로 존중된다.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흔들리자, 낭야왕씨는 절강성(浙江省) 소흥인 회계(會稽) 산음(山陰)으로 이주해 동진의 최고 호족이 됐다. 대문의 맞은편에는 왕희지가 벼루를 씻던 세연지와 햇볕에 책을 말리던 쇄서대(曬書臺)가 있다. 연간 10만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이다.

몽산(蒙山)에는 72개 봉우리와 36개 동굴이 있다. 거북을 닮은 주봉 구몽정(龜蒙頂)은 해발 1156m로 산동성에서 2번째로 높다. 엄청난 숲이 보존된 천연공원이 바다와 이어져 있어서 당현종, 송신종, 휘종, 청의 강희, 건륭제 등 제왕과 문인들이 자주 찾았다. 맹자는 공자가 몽산에 올라가 작은 노나라라고 불렀다고 했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손빈(孫矉)과 방연(龐涓)의 스승으로 알려진 귀곡자(鬼谷子) 왕선(王禪)의 은거처는 옥주봉 서쪽에 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745년에 함께 몽산에 올랐다. 두보는 ‘가을 경치에 취해, 손을 잡고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시를 지었다. 소동파도 몽산에 올라 ‘상전벽해가 된 발해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은, 몽산을 적시는 봄을 보기 때문’이라는 시를 지었다.

난릉고묘(蘭陵古墓)는 전국시대 고묘로 순자(荀子)가 안장된 곳이다. 창산현(蒼山縣) 난릉진에 있으며, 황토로 봉분을 만들었다. 묘지 앞의 두 비석은 청대에 세웠다. 소수로 다수를 통치한 만주족 정권이 한족에게 보낸 호의일 것이다. 순자는 전국시대 월(越)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황(況)이다. 낭야는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이 중원쟁패를 위해 도성을 옮긴 곳이다. 순황은 제의 수도 임치(臨淄)에 개설된 직하학궁의 총장인 좨주(祭酒)를 역임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잇는 유학의 대가로 한비(韓非)와 이사(李斯)의 스승이다. 전국시대 4군자 가운데 하나인 초 춘신군(春信君)의 초빙을 받아 난릉령(蘭陵令)이 됐다가, 춘신군 사후에 면직되자 이곳에서 저작에 몰두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의 고향은 기남현(沂南縣) 전부향(磚埠鄕)의 양도고성(陽都故城)에 있다. 181년에 그가 태어난 곳이다. 양도고성의 동쪽은 기하(沂河)가 흘러가고, 서쪽의 절벽에서 돌로 쌓은 견고한 고대 성벽이 출토됐다. 고성 북쪽으로 흐르는 동기하의 강가에는 1.5㎞ 정도의 흔적이 남았다.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사라져가는 성벽의 흔적을 보면서 제갈량고리기념관에서 수령이 1천년 이상인 거대한 은행나무와 유명한 전후출사표를 새긴 2개의 비석을 어루만진다. 낭야는 무수한 인물을 낳았지만, 여전히 조용한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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