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윤선도 보길도 탐방…“하늘이 나를 기다려 보길도에 멈추게 했다”
[쉼표] 윤선도 보길도 탐방…“하늘이 나를 기다려 보길도에 멈추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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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가 각별한 인연으로 여기며 서정적인 시가를 남긴 보길도. 보길도 예송리해변에서 바라본 일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고산 윤선도가 각별한 인연으로 여기며 서정적인 시가를 남긴 보길도. 전남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 떨어진 보길도는 땅끝 해남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면 닿는다. 보길도 예송리해변에서 바라본 일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

해남서 왕 구하러 나선 윤선도

가던 중 1월말 삼전도굴욕 소식

 

이 땅을 다신 밟지 않겠노라며

제주로 향해 뱃머리 돌려 가다

해남 아래 위치한 보길도 만나

[천지일보=송태복 기자] “상(인조)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오랑캐가 쳐들어오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해남에서 들은 윤선도는 노복과 가솔을 이끌고 왕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다 1637년 1월 30일 도중에 왕자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은 삼전도에서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는다. 소식을 접한 윤선도가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제주도(탐라)를 향해 뱃길을 돌렸다 머문 곳이 보길도다.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고 할 만큼 윤선도는 보길도와의 인연을 각별하게 여겼다. 


전남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 떨어진 보길도는 땅끝 해남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면 닿는다. 취재진이 그곳에 당도한 날도 삼전도 굴욕이 있던 때와 같은 1월말이었다. 윤선도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고해라도 하듯 그날 보길도의 바람은 매서웠고 추운 날씨는 변덕스럽기까지 했다. 

윤선도 유적이 있는 부용동 일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6
윤선도 유적이 있는 부용동 일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6
 

◆외로운 산, 고산을 자호로 삼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신이자, 효종‧현종의 사부, 시조작가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대 시가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생활을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다섯 벗으로 비유하여 지은 ‘오우가’가 유명하다. 강직했던 삶과 달리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리드미컬하다. 윤선도는 사대부의 주류 문화였던 한시(漢詩)에 비해 홀대당하고 있던 시조에 우리말의 감성과 서정성의 숨결을 불어넣어 미학(美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년)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의 집안은 대표적인 동인 가계였으며, 그 중 윤선도는 동인 내에서 다시 갈라졌던 북인과 남인 중 남인을 대표하는 문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인으로 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는 각종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윤선도가 한양과 멀리 떨어진 땅끝 마을 해남과 관계를 맺은 시기는 나이 8세 때다. 1594년(선조 27년) 백부(伯父)인 관찰공(觀察公)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 윤씨 대종가(大宗家)의 대를 잇는 종손(宗孫)이 되면서부터였다. 실제 관계로는 작은 아버지였지만 족보상으로는 큰 아버지였던 윤유기에게 양자로 들어가면서 윤선도는 호남 제일의 명문가이자 대부호였던 해남 윤씨의 대종손(大宗孫)이 됐다. 


고산이라는 윤선도의 호는 별장이 있던 양주에서 비롯됐다. 한강 주변에 위치한 양주에 홍수가 나 강이 범람하면 사면이 물에 잠기곤 했는데 유독 ‘퇴매재산’만 우뚝 솟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바다에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가리켜 ‘고산(孤山)’이라고 했는데, 윤선도는 이 고산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고고한 기상은 물론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자호(自號)로 삼았다.

윤선도 유적이 있는 보길도 부용동원림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세연정.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윤선도 유적이 있는 보길도 부용동원림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세연정.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고산, 호처럼 외로웠던 삶

효종, 현종의 사부였으나 

강직한 성품에 잦은 유배

 

보길도 윤선도유적 곳곳

이상세계 세우려던 흔적

남다른 심미안도 보여줘

◆강직한 삶이 부른 잦은 유배 


윤선도는 1612년(광해 4년)에 진사과에 합격한 뒤 성균관 유생이 됐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30세(1616, 광해 8년)에 이이첨과 박승종·유희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경원·기장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광해 15년) 인조반정 후 석방돼 의금부도사에 취임했으나, 곧 사직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628년(인조 6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고 한양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 차례에 걸쳐 나라에 중용됐다. 1638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당해 이듬해 풀려나기도 했다. 병자호란 후에는 주로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며 원림을 경영했다. 


1659년 효종의 죽음 이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냐를 두고 복제 논쟁이 빚어졌다. 논쟁은 “효종이 적통이냐 아니냐”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허목과 송시열의 논쟁에 효종의 사부였던 74세의 윤선도가 기름을 부었다. 윤선도는 복제논쟁과는 별도로 송시열을 공격했다. 윤선도의 과격한 상소로 인해 남인은 제1차 예송논쟁에서 패하고 자신은 1660년(현종 1년) 4월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됐다. 1665년 광양으로 이배된 후 81세가 되던 1667년(현종 8년)에야 석방된 뒤 보길도에 은거하다가 85세인 1671년(현종 12년) 낙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 낙서재. 부용동원림 내에 있는 살림집으로 윤선도는 이곳에서 수많은 시가와 글을 썼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 낙서재. 부용동원림 내에 있는 살림집으로 윤선도는 이곳에서 수많은 시가와 글을 썼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부용동·세연정·낙서재·판석보


윤선도의 보길도 유적은 부용동(芙蓉洞) 일대에 있다. 이를 뭉뚱그려 부용동 유적, 혹은 윤선도 원림(명승 34호)이라 부른다. 윤선도는 1637년(인조 13년)부터 1671년 사망할 때까지 일곱 번이나 이곳에 드나들며 글을 쓰며 생활했다. 햇수로는 13년간 오가며 어부사시사 등 시가를 창작했다. 보길도 부용동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양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세연정을 비롯해 살림집인 낙서재, 아들 학관이 휴식을 위해 지었다는 곡수당, 바위산 중턱의 단칸 정자 동천석실 등이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이다. 격자봉 등 사방을 둘러친 산자락들이 내려와 맺힌 자리다. 윤선도는 이곳을 ‘선계(仙界)’ 곧 신선의 세계라 이르고 말년의 은둔지로 삼았다. 부용동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명소는 부용동 유적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세연정으로 정원과 정자가 있다. 세연(洗然)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계류를 돌둑(판석보)으로 막아 연못(세연지)을 조성하고, 그 물을 끌어들여 사각형의 인공 연못(회수담)을 만든 뒤, 두 연못 사이에 세연정을 세웠다. 세연정의 문은 모두 위로 들어올릴 수 있는 구조다. 그 덕에 바람과 풍경, 사람과 시간이 정자 문지방을 무시로 넘나든다. 그야말로 자연을 벗삼은 정자다. 


세연정에서 물길을 건너면 돌로 단을 쌓은 동대와 서대가 있다. 정원의 중심인 세연정에서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만든 무대다. 정원 안에 음악과 더불어 무희들이 춤을 추는 무대를 조성한 이 공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회수담의 물은 서대와 동대 뒤의 작은 개울을 거쳐 하류로 흘러간다. 이 낮은 개울가에는 토성처럼 둑을 쌓고 대나무와 상록수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담이 아닌 숲과 언덕이 그대로 울타리가 됐다.

판석보. 굴뚝다리라 불리며 건기에는 다리 우기에는 폭포가 되는 판석보는 윤선도의 심미안과 과학적 지식의 산물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6
판석보. 굴뚝다리라 불리며 건기에는 다리 우기에는 폭포가 되는 판석보는 윤선도의 심미안과 과학적 지식의 산물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6
 

동대를 돌아가면 개울을 막은 ‘판석보(板石洑)’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정원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석조보로 굴뚝다리라 불리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건기에는 돌다리가 되고, 폭우가 내리면 폭포가 되도록 고안한 판석보는 윤선도의 건축적 재능과 심미안의 산물이다. 판석보를 건너 산자락을 거슬러 오르면 옥소암이 나온다. 세연정 전경을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세연정에서 도로를 따라 좀 더 위로 거슬러 오르면 낙서재, 곡수당 등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만난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낙서재란 학문이나 글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는 뜻이다. 낙서재 내에는 조상의 위폐를 모신 무민당, 동서쪽의 휴식공간인 동와, 서와, 병풍처럼 아름다운 바위라는 소은병이 있다. 

윤선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생활했던 낙서재 맞은편 초막 동편석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윤선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생활했던 낙서재 맞은편 초막 동편석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봉황, 기린, 용, 거북)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봉황, 기린, 용, 거북)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낙서재 맞은 편 절벽 바위 위에 동천석실이라는 초막이 있다. 하늘로 통하는 곳에서 마치 땅을 내려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곳에서 윤선도는 독서를 즐겼다.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는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봉황, 기린, 용, 거북)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보길도 백도마을에 있는 글씐바위.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보길도 백도마을에 있는 글씐바위.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보길도 백도마을에 있는 글씐바위.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보길도 백도마을에 있는 글씐바위.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남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송시열의 흔적, 글씐바위


보길도는 난대림이 우거진 남도의 섬이다. 섬 곳곳의 난대림과 가장 잘 어우러진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 예송리해변이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뜨는 해와 함께 배 띄우고 지는 해와 함께 희망을 채워 돌아오는 어부들을 보며 영감을 얻어 주옥같은 시조를 지었을 것이다. 


보길도 백도마을 바닷가엔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다. 희빈 장씨가 왕자(경종)를 출생하자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원자로 책봉했다. 우암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에 며칠간 머물면서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적어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 바위에 씌어진 시문은 우암 송시열이 사망하던 해(숙종 15년, 1689)에 지었다.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송시열이 귀양길에 보길도에 들러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해남군 송지면 소죽리에서 바라본 일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은 해남에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해남군 송지면 소죽리에서 바라본 일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은 해남에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3.14

윤선도는 풍수학에서도 신안(神眼)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높은 안목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난세에 운명처럼 만난 보길도. 그는 난대림이 우거진 사뭇 다른 느낌의 남쪽 섬에서 성리학적 이상세계, 무릉도원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취재진 역시 시베리아급 맹추위가 떨친 날 찾았음에도 보길도에서 꿈틀거리는 봄기운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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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민 2018-04-13 12:41:44
양양의 서석지가 아니라 경북 영양군의 서석지입니다.

장대성 2018-03-16 11:16:46
와와~~~ 정말 아름답다 보길도가 이렇게 멋진곳이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