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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Ⅰ ‘보길도 송시열 글씐바위’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이름을 떨친 고산 윤선도. 하지만 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선비의 절개를 올곧이 지키며 정치적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3차례 20여 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동시에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전부터 그는 실용학문을 익히고 직접 현실세계에 접목하면서 혁신가로서의 면모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전남 완도 보길도와 진도 굴포마을의 간척지다. 이제 우리는 문학인 고산 윤선도가 아닌 정치가이자 혁신가인 고산 윤선도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자.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에서 바라본 바다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보길도엔 세연정, 세연지, 낙서재 등 고산 윤선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았다. 그런데 고산과 숙명적으로 대립관계였던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손길이 남아있어 방문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알고 보았더니 1689년 여든을 넘긴 우암은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머물렀단다. 이곳에 머물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늙은이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을 시로 바위에 새겨놓았단다. 지금은 그 글씨들이 점점 세월에 묻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탁본의 흔적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꼭 우암의 마음을 대변하듯, 바닷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도 편편한 바위에 올라선 노구는 한편으론 든든하지 않았을까 한다. 비록 보길도가 영원한 라이벌 고산의 영역이지만, 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듯 우암은 고산을, 고산은 우암을 서로 신뢰했다. 내로라하는 의원들도 우암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 때 고산의 약을 먹고 나았던 우암. 그래서인지 글씐바위엔 고산을 뜻하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인데
대궐에 계신 님을 부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잊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사진촬영: 이승연 기자 / 슬라이드 편집: 손성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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