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 (제공: 서울시) ⓒ천지일보 2020.7.10
박원순 서울시장. (제공: 서울시) ⓒ천지일보 2020.7.10

대구지검 검사로 사회생활 시작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변호

‘성희롱은 범죄’ 인식 만든 사건

사상 첫 승소… 인권변호사 굳혀

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

 

시민단체 ‘참여연대’ 설립 주도

소액주주·낙선운동 등 이끌어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도전

내리 3선 성공… 대권주자 부상

‘메르스 정국’ 당시 과감 행보

한때 대선후보 선호도 1위도

 

前비서 ‘성추행’ 고소장 제출

9일 갑작스런 실종 신고 접수

10일 북악산서 시신으로 발견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최장수 시장이던 박 시장의 인생 역정이 허망하게 마무리 됐다.

검사,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그리고 대선주자…. 숨 가쁘게 살아온 박 시장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봤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한 박 시장은 중학교 졸업 후 서울 경기고에 입학하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지만, 같은 해 5월 고(故) 김상진 열사 추모시위 참가로 투옥, 4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긴급조치 명령 9호’ 위반이 이유였다. 재수까지 하며 간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지만 박 시장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 시기가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짚기도 했다.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다시 단국대 사학과에 들어간 박 시장은 1980년엔 제22회 사법고시에 당당히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1982년 대구지검에서 검사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만뒀다. 박 시장은 그 이유를 “사람 잡아 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라고 밝혔다. 폭탄주 등 강압적 조직문화도 거부감을 느꼈다고도 했다.

이후 1893년 변호사로 변신한 그는 1986년 권인숙씨 성고문사건 변호인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변호에도 참여했다.

변호사 시절 박 시장의 행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변호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기된 직장 내 성희롱 소송이자 성희롱이 범죄임을 인식시킨 최초의 소송이었다.

박 시장은 1992년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1년간 객원연구원으로 활동 했는데, 당시 접하게 된 직장 내 성적 괴롭힘(sexual harrassment)개념을 국내에도 도입한 것이다.

6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1998년 승소를 이끌어낸 박 시장은 인권변호사로서 큰 주목을 받았고, 같은 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는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1998년 출범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학술간사로도 활동했다.

◆참여연대 이끈 시민운동의 대부

박 시장은 시민운동가로서도 족적을 남겼다.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고, 사무처장을 맡으며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의 대표 격이 되는 데 공을 세웠다.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등이 다 그가 사무처장으로 재직할 당시 진행됐다.

이후에도 2000년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2006년 ‘희망제작소’ 등 여러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며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시민운동가로 자리매김 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86명의 낙선 대상자를 발표하며 엄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고, 아름다운 재단·가게는 기부 문화 정착에 이바지를 했다. 희망제작소는 민관협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도 받았다.

2011년 당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박원순 변호사가 같은 해 9월 7일 저녁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참여연대 창립 17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2011년 당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박원순 변호사가 같은 해 9월 7일 저녁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참여연대 창립 17주년 기념 후원의 밤 행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다.

◆첫 3선이자 최장수 서울시장

박 시장이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2011년이다. 당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한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그 여파로 사퇴하면서 보궐선거가 잡혔고, 박 시장이 출마하면서 서울시장으로서의 여정이 시작됐다.

선거 과정에서 박 시장은 불과 5%의 지지율로 출발했지만, 유력한 후보였던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양보하면서 진보진영의 유력 주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아들의 병역문제는 두고두고 박 시장을 괴롭혔다. 하지만 기어코 당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2012년엔 민주통합당에 입당하면서 정당인으로서의 행보도 시작했다.

박 시장은 2014년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했고, 막강했던 당시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를 제압하며 대권후보로 부상했다.

2015년은 박 시장의 존재감을 드러낸 중요한 해였다.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가 전국을 휩쓸 당시 박 시장은 “늑장대응보다 과잉대응이 낮다”며 방역전선 전면에 나섰다. 이로 인해 당시 박근혜 정부와 충돌하기도 했지만, 박 시장의 지지도는 상승곡선을 그려 대권주자 선호도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후문의 장애인단체 노숙농성장을 찾아 발언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30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후문의 장애인단체 노숙농성장을 찾아 발언하고 있다. ⓒ천지일보 2019.4.30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치러진 2017년 19대 대선에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생각보다 지지율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2018년 6.13 지방선거에 세 번째 도전했고,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와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를 꺾으며 3선에 성공하면서 첫 3선 서울시장이라는 영예도 누렸다.

박 시장은 “조선 시대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부터 따져도 저보다 서울시장을 오래 한 사람은 없다”며 자신이 누구보다 더 오래 서울시장을 역임한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때엔 “용기 있는 행동”이라며 “사회적 연대도 필요한 것 같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국에서도 박 시장은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고, 코로나 사태로 인한 긴급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 논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기본소득에 대한 말을 주고받으며 논의를 이어나간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갑작스런 실종·사망… 그리고 ‘미투’ 고소

그러나 2020년 7월 9일 박 시장은 갑작스럽게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잠적했다. 박 시장의 딸은 실종신고를 했고, 북악산 일대를 수색한 경찰이 박 시장의 시신을 발견했다. 10일 0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박 시장의 임기 기록도 3180일로 마감됐다.

박 시장의 실종이 알려지자 전날인 8일 박 시장의 전직 비서가 성추행으로 그를 고소했다는 사실도 전해지며 박 시장의 실종과 관련 있는 게 아니냔 추측이 돌기도 했다.

이날 서울시는 박 시장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박 시장은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 모두 안녕”이라고 남겼다.

박 시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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