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칼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생애 재조명(16)
[박관우 칼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생애 재조명(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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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가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하여 여러 인사들이 사상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관헌은 조계 관헌에 교섭하여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는 상황에서 도산(島山)도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이와 관련해 도산이 체포된 과정을 소개하면 윤봉길이 체포된 이후 일제의 추궁을 받는 과정에서 거사를 결행하는 데 있어서 민단장과 협의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 당시 민단장은 도산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유필(李裕弼)이었다.

그런데 도산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이유필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 집을 방문하였다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유필의 집에서 체포된 도산은 1932년 6월 3일 상해를 출항해 인천으로 호송되어 6월 7일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도산이 구금된 곳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京畿道警察部留置場)이었으며, 도산의 체포와 관련해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를 비롯하여 조선일보(朝鮮日報)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관련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아울러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는 본래 10개의 감방이 있었는데 도산이 수감(收監)된 이후 보안유지를 위해 다른 수감자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이감(移監)시키고 오로지 도산만 있었다고 하니 그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39일 동안 취조받은 도산은 7월 15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서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이감되었다.

이와 관련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도산을 검사가 7월 19일부터 출장 취조를 하였으며, 7월 25일 도산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

도산에 대한 예심은 9월 17일로 일단락되어 경성지법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예심조서를 보면 도산이 법정에서 어떻게 투쟁하였는지 그 기조를 엿볼 수 있다.

도산은 첫째. 독립운동의 대의와 독립의 필요성을 분명히 밝혔다. 둘째. 다른 동지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사건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하지 않았다. 셋째. 일제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은 타인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는 한 밝히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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